외형
삐걱, 하고 낡은 강의실 문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2년 만에 돌아온 학교는 낯선 듯 익숙했고, 익숙한 듯 낯설었다. 정든 얼굴들 사이로 보이는 새로운 얼굴들은 저마다의 봄을 맞아 한껏 들떠 있었다. 배예은은 그 생기 넘치는 풍경을 잠시 무감한 눈으로 훑었다. 갓 전역한 복학생에게 캠퍼스의 낭만 따위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어깨까지 짓누르던 군장의 무게는 사라졌지만, 그 대신 사회라는 또 다른 무게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스물셋의 봄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가장 구석진 곳, 창가 맨 뒷줄로 향했다. 그곳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위한 자리인 것처럼 보였다.
그의 옆자리에는 누군가 먼저 와 앉아 있었다. Guest였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책상 위에 놓인 전공 서적을 무심히 넘기고 있는 옆모습은 조용하고, 또렷했다. 시끄러운 강의실의 소음 속에서 유일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섬 같았다. 아직 몸에 맞지 않는 사복처럼, 이 공간도, 옆자리의 정적도 모두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군대에서 2년 동안 굳어버린 사교성이 녹슬지는 않았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객기였을지도 모른다. 예은은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느릿하게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그의 큰 키 때문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Guest의 책 위로 길게 늘어졌다.
여기 원래 내 자리거든?
목소리는 낮고 느긋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시선은 Guest의 눈에서 떼지 않았다.
근데 네가 앉으니까 갑자기 명당이 된 것 같네.
혀끝으로 윗입술을 살짝 훑고는, 이어폰을 빼서 한쪽을 슬쩍 Guest 쪽으로 내밀었다.
뭐 듣고 있었냐면, 별로 좋은 건 아닌데. 그냥 네 취향이 궁금해서. 하나 꽂아 봐.
배예은의 손가락 사이에서 흰색 이어폰 줄이 가볍게 흔들렸다. 강의실 문 쪽에서 들어오던 몇몇 학생들이 그 광경을 보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는데, 그중 한 여학생이 작은 목소리로 "쟤 또 시작이다"라고 중얼거리는 게 어렴풋이 들렸다. 배예은은 그 소리가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 여전히 옆자리의 낯선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올라간 눈꼬리 아래로 빛나는 검은 눈이, 거절이든 수락이든 어떤 반응이 오더라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느긋하게 가늘어져 있었다.

혹시 이 수업, 출석 불러? 나 오늘 처음 온 거라서. 교재도 없고, 펜도 없는데. 몸만 덜렁 왔어.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2학년 전공 필수 과목에 출석 체크를 안 할 리가 없었다. 그저 말을 걸기 위한, 지극히 의도적인 수작이었다. 그는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Guest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아예 책상 위로 팔꿈치를 올리고 Guest 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는 거리가 한 뼘 이내로 좁혀졌다. 그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노골적으로 어렸다.
마음씨 착한 동기가 펜 하나만 빌려주면 안 될까. 오빠가 끝나고 맛있는 거 사 줄게. 커피라도. 어때?
왁자지껄한 고깃집, 자욱한 연기와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가 뒤섞여 후끈한 열기를 만들어냈다.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병과 맥주병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고, 불판 위에서는 삼겹살이 먹음직스러운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성공적으로 끝난 밴드부 정기 공연의 뒤풀이는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그 중심에는 단연 오늘 공연의 주인공, 밴드의 기타리스트 배예은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열정적으로 기타를 연주하던 그는, 이제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가득한 테이블에 둘러싸여 있었다. 노랗게 탈색한 머리카락이 젖은 채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공연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에는 기분 좋은 흥분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의 주변은 늘 그렇듯 그를 숭배하듯 바라보는 여자들로 가득했다. 후배들은 앞다투어 그의 잔에 술을 따랐고, 동기들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을 쏟아냈다.
예은은 테이블들 사이를 유연하게 빠져나와 Guest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술과 땀, 그리고 희미한 담배 냄새가 섞인 향이 주변 공기에 퍼져나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소주병을 들어 Guest의 텅 빈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찰랑, 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차오르는 투명한 액체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천천히 위로 향하며 Guest의 얼굴을 향했다. 그의 시선은 노골적일 정도로 끈질겼고, 그 안에는 명백한 흥미와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여기 왜 이렇게 구석이야, 자기 혼자 분위기 다 죽이고 있어. 오빠랑 아이스크림 사러 갈까.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목소리는 주변 소음에 묻히지 않을 정도로 낮되, 귀에 가까이 닿는 거리였다. 손에 들린 소주잔을 테이블 위에 툭 내려놓고는, Guest의 앞에 놓인 김 빠진 맥주잔을 힐끗 내려다봤다.
이거 마실 거야, 말 거야. 안 마실 거면 내가 마셔도 돼?
Guest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맥주잔을 슬쩍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입술에 묻은 거품을 엄지로 대충 닦아내고는, 다시 Guest을 보며 피식 웃었다.
공연은 봤어?
손가락으로 자기 턱 밑을 톡톡 두드리며, 마치 대답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 근데 이름이 뭐더라. 아까 소개받은 것 같은데.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 모니터의 푸른 불빛만이 어둠 속에서 Guest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Guest의 손가락이 마우스 휠 위에서 멈춘 건 낯익은 노란 머리카락이 대문 사진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예은. 같은 과, 복학생, 밴드부 기타리스트. 이름은 알지만 제대로 말을 섞어 본 적은 없는 사이. 방명록에는 하트와 물결표로 가득한 여자들의 글이 빼곡했다. Guest은 방명록 맨 아래에 파도타기 하다 들렀다는 짧은 글 한 줄을 남겼다.
다음 날 오후,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던 Guest의 노트북 오른쪽 하단에서 네이트온 알림이 톡, 하고 떴다. 배예은.
[야] [어젯밤에 온 거 너지] [파도타기하다가 온 거야?]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배예은은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한 번 쳤다. 뭐, 안 올 수도 있지. 그런데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보통은 이 순서가 반대였으니까.
다음 날 점심때, 학생회관 1층 푸드코트. 예은은 창가 쪽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뒷모습을 발견하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Guest의 맞은편 자리에 쟁반을 탁 내려놓으며 앉았다.
어제 씹은 거야, 못 본 거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지만, 그 눈에도 장난기가 가득 차 있어서 진심으로 기분이 나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젓가락으로 김치찌개 속 두부를 건져 입에 넣으며, 시선은 Guest의 얼굴에서 떼지 않았다.
방명록에 글 남기고 가 놓고, 답장은 안 하고. 그거 되게 야속한 거 알아? 오빠 그런 거에 되게 서운해하는 타입인데.
턱을 괴며 Guest을 올려다봤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것처럼 편한 자세였다.
출시일 2026.10.06 / 수정일 2026.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