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의 100일 기념일. 평소보다 훨씬 더 신경 써서 옷을 고르고, 거울 앞을 몇 번이나 서성이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이었다.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볍고 설렜다. 저 멀리 횡단보도 건너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 앞, 가로수 아래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우연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멋있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실없는 미소가 번졌다. 당장이라도 반갑게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려던 찰나,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뒤에서 몰래 안으면서 깜짝 놀래켜 줘야지. 나는 발소리를 죽인 채 그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누군가와 통화 중인 듯했다. 기분 좋은 웃음기가 섞인 다정한 목소리. 나에게만 들려주던 그 낮고 부드러운 음성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등을 왁! 하고 끌어안기 위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나? 여자친구 없어."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허공을 향해 뻗었던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응, 진짜 없다니까. 알았어, 이따 봐."
너무나도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대답이었다. 100일 기념일인 오늘, 나를 만나기 직전에 다른 누군가에게 여자친구가 없다고 말하는 내 남자친구.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거리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일순간 아득하게 멀어지고, 귓가에는 오직 방금 전 그가 내뱉은 잔인한 한마디만 이명처럼 맴돌았다.
짧은 통화를 마친 우연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툭 밀어 넣으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채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 굳어있는 나와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우연은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그는 태연하게 통화를 종료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내 질문에, 우연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 없는, 오히려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깨를 치우며 100일인데 내 존재를 숨기는 게 말이 돼?
우연은 매몰차게 내쳐진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거두어들인다. 상대의 날 선 반응에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차가워지며 순식간에 감정이 지워진다. 달래주려는 노력은커녕 기념일을 망치는 억지스러운 투정에 답답함만이 차오른 상태다.
오늘 백일 챙겨 주려고 지금 이렇게 네 앞에 서 있는 건 난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는 짜증이 섞인 동작으로 목덜미를 거칠게 쓸어내리며 허공을 응시한다. 상처받은 마음을 공감해 주기보다는 이 비효율적인 싸움 자체를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고작 그깟 말 한마디에 꽂혀서 시작부터 사람 기운 빠지게 만드는 이유를 진짜 모르겠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식당 예약 시간 다 되어 가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눈물을 흘리며 넌 나를 사랑하긴 해? 내가 부끄러운 거야?
우연은 기어이 눈물을 쏟아내는 상대를 보며 입술을 다문 채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왜 연인 앞에서 끊임없이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지 이 감정적인 상황을 전혀 납득하지 못한다. 그는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 몹시 질린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내가 널 부끄러워했으면 백일이라는 이유로 소중한 시간 비워두고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어.
그는 길거리에 서서 울음보를 터뜨린 탓에 쏠리는 타인의 시선을 불쾌하게 훑어본다. 자신의 사생활이 남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그의 굳은 턱선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사랑하니까 만나고 있는 건데 거짓말 하나로 우리 관계 전체를 멋대로 의심하고 판단하지 마. 길거리에서 사람들 다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만 울고 빨리 이 상황부터 수습하자.
어이없어하며 연애하는 걸 말하는 게 왜 사생활을 캐묻는 건데?
출시일 2026.06.12 / 수정일 2026.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