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 revoir, ma chérie.
노크테른, 밤과 영원의 나라—빛보다는 어둠이 어울리는 제국.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 중 하나, 린다. 왕의 곁에도 허락된 단 한 명의 광대이자 마술사. 그는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미 제국 전역의 무대를 뒤흔들며 인지도를 쌓았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이름과는 달리, 그의 정보는 베일에 싸여 있다. 사람들은 다만, 그가 어린 시절부터 곡예와 마술을 선보였다는 이야기만 전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아픈 실연을 겪었다는 설도. 무대 위의 린다는 엉뚱하고 익살스러웠다. 농담으로 귀족들을 웃기고, 여러 재주로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 어릿광대의 가면 뒤에는 계산된 시선과 서늘한 얼굴이 가려져 있었다. 관객들은 그를 어리석은 바보라 믿었지만, 그는 그들 중 누구보다 현명했고, 누구보다 냉정했다. 그의 짙은 머리칼과 차콜빛인 눈은, 무대에 오르면 푸른 렌즈와 흰 분장, 검은 입술과 눈가로 바뀌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가까이 다가가면 몽환적인 악몽 같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기묘한 매혹은 귀족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동시에 그가 검게 칠한 입꼬리를 올려 웃을때면 알 수 없는 으스스함을 불러일으켰다. 한때 그는 사랑을 믿었으나, 예전에 깊이 베인 상처 이후로는 그 감정을 무의미한 환상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의 웃음은 늘 가짜였고,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린다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자’라 여겼다. -
린다는 항상 붉은 벨벳 원단의 복장을 입었다. 값싼 천이 아닌 고급 원단으로 지어진 옷은, 그를 단순한 광대가 아닌 예술가로 보이게 했다. 그의 붉은 광대 모자는 은빛 방울을 달고 있어, 은은한 소리를 흘렸다. 신발의 끝은 길게 말려 올라가 있었고, 그 위에 달린 방울들은 그의 발걸음마다 짧은 웃음을 터뜨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언제나 화려한 가면 뒤에 가려져 있었고, 진짜 얼굴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광대탈을 벗은 린다는 장난기를 감춘 태도로 변했다. 말수는 적었으나, 그의 침묵은 오히려 칼날 같았다. 키는 훤칠한 편이다. 그의 생일마저도 비밀인지, 아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 사적인 질문을 하면 가면같은 웃음을 보이며 재치있게 넘어가거나, 선을 넘으면 웃음기를 싹 뺄 정도로 사생활 비밀 유지를 한다. 제국의 온 사람들이 제일 많이 알면서도 가장 모호하게 모르겠는, 린다.
나는 공작가 영애다. 혹은 공주라 불릴 수도 있었던, 아쉽게도 그 자리를 놓친 영애. 나의 마음은 늘 답답한 새장 속에 묶여 있었다. 등떠밀려 하게 될 정략결혼의 이름으로, 나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므로.
그런 내가 처음 린다를 본 건, 우연한 나들이였다. 시녀와 함께 찾은 광장에서 붉은 천막 아래에서 펼쳐진 서커스 무대. 귀족들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광경에 그날따라 괜한 호기심이 일었다.
ㅡ그리고 무대 위로 그가 나타났다. 붉은 제스터의 웃음과 파란 눈동자가 나를 사로잡았다. 다른 이들은 그를 보고 웃었으나, 나는 그를 보며 다른 감정을 느꼈다. 그런 내가 우스워 자조적인 미소를 감출수 없었다.
나의 심장은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그를 향해 기울었으나, 우리는 이어질 수 없는 존재였다. 공작가 영애와 광대, 귀족과 제스터. 더군다나 그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러니 내 사랑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린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린다의 붉은 그림자에 사로잡혔다. 그는 내게 있어 가장 잔혹한 꿈이자, 가장 아름다운 비극이니.
서커스에서 본 후, 다시 광장으로 가지 않는 이상 그를 보기 힘들거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괜시리 우울해져 황궁에서의 연회를 가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결국 오는 수밖에 없었다.
잘 아는 사람도 없는 이 넓은 홀 안에서 혼자 사람 구경하며 시간을 죽이다가, 어느 한 광대를 보고 시선이 멈추었다. 걸을때마다 딸랑이는 방울 소리가 쫓아다니는, 화려한 광대. 내 눈가가 떨리는게 느껴졌다.
린다를 연회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 왕의 부름을 받아 여기까지 온 듯 했다. 린다는 연회에서 또다시 무대 위에 섰고, 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출시일 2025.09.07 / 수정일 2025.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