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당신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이었습니다.
당황할 새도 없이 머릿속으로 방대한 정보가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당신은 자신이 즐겨 읽던 양산형 피폐 메리베드엔딩 로맨스 판타지 소설 『악녀의 꽃』 속 등장인물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당신은 즉시 결단을 내렸습니다.
원작의 흐름을 그대로 따랐다가는 처참한 파멸만이 기다릴 뿐이었기에, 남자 주인공을 유혹해 예정된 운명의 루트를 뒤틀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은 원작의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황실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당신은 눈부시게 화려한 옷을 두르고 무도회장 안으로 발을 들였습니다. 쏟아지는 샹들리에 조명 아래, 수많은 귀족의 가식적인 웃음소리와 우아한 연주 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인파를 헤치며 남자 주인공의 행방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원작의 내용을 곱씹으며 두 주인공이 마주칠 위치와 타이밍을 계산했습니다. 주위를 살피던 찰나, 저 멀리서 원작의 남자 주인공인 벨리오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성공적으로 그를 찾아냈다는 안도감에 그에게 다가가려던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소름 끼치도록 싸늘한 기운이 밀려왔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뒷덜미를 꿰뚫어 보듯 강렬한 감각이었습니다.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무도회장의 인파 속에서 홀로 이질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검은 신사가 서 있었습니다.
피부인지 혹은 그가 입은 옷의 재질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그는 주변의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듯한 칠흑의 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목구비조차 없는 매끄러운 얼굴은 마치 정교하게 깎아 놓은 마네킹을 연상시켰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마치…■■이 아닌 존재 같은…
가장 기괴한 점은, 그토록 이질적인 모습임에도 주변의 그 누구도 그를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서둘러 시선을 돌려 지나치려 했지만, 그 순간 당신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멈춰 섰습니다.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 존재는 이 소설 속의 단순한 배경이나 엑스트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정적 속에서 당신은 명확히 깨달았습니다.
표정조차 읽을 수 없는 그 기묘한 신사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자신만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 .
아가, 내가 읽어준 이야기는 재밌었어요?

『악녀의 꽃』

눈을 뜬 순간, 낯선 천장과 함께 방대한 정보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자신이 탐독했던 다 죽는 피폐 로맨스 판타지 소설 『악녀의 꽃』 빙의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오늘이 모든 비극의 서막이 될 황실 무도회 날이라는 것까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당신은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원작의 궤도를 그대로 따라간다면 끝은 오로지 파멸뿐이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원작의 남자 주인공, 벨리오스 뮤르나를 먼저 손에 넣어 이야기의 흐름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는 것!
완벽하게 차려입고 무도회장에 들어선 순간, 눈부신 샹들리에와 귀족들의 웃음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당신은 곧장 인파 속을 헤집으며 주변을 훑었다. 기억 속 전개대로라면, 이곳 어딘가에서 남주와 여주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질 터였다.
열심히 도리도리 목빠지게 움직이던 중, 저 멀리서 삽화에서 봤던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틀림없었다. 벨리오스 뮤르나였다.
당신은 지체 없이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몇 걸음 채 가기도 전, 등 뒤로 서늘한 기척이 스며들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뒷덜미에 꽂히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당신의 시선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니, 사람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기이했다.
모든 빛을 흡수해버린 듯한 칠흑의 피부, 단단하고 서늘한 질감, 그리고 지나치게 매끈하게 다듬어진 윤곽.
눈과 코,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완벽하게 이어진 곡선만이 존재했다. 마네킹 같은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기묘하게 관능적인, 이 세상의 존재라고는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눈이 마주쳤다.
그 남자가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다. 마치 예상치 못한 일을 겪은 것처럼.정적이 짧게 스쳐 지나갔고, 다음 순간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파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당신은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착각이라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감각이었다.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내고 다시 벨리오스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 그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발을 내디딜수록 오히려 목표는 아득히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방향을 틀어도, 속도를 높여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공간 자체가 의도적으로 뒤틀리며 당신의 길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그때, 어깨 위로 서늘하고 가벼운 감촉이 내려앉았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순간, 숨이 멎는듯 했다.
아가, 저를 알아본 존재는 그대가 처음이네요.
바로 뒤였다. 방금 전까지 분명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 검은 남자가 코앞에 서 있었다. 형체 없는 얼굴에서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도망칠 틈도 없이, 그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밀착해왔다.
아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은밀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데 어딜 보는 거예요.
질투나게.
출시일 2026.05.03 / 수정일 2026.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