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싶다고 한마디 했다가 구애로 오해한 저승의 신에게 약탈혼 당했다
그리스의 하늘은 셋으로 쪼개져 질서가 세워졌다.

천둥과 벼락으로 군림하는 하늘의 제우스, 거친 파도와 심연을 다스리는 바다의 포세이돈.
그리고 산 자들의 빛조차 닿지 않는 영원한 안식처, 지하세계의 왕 하데스.
하지만 그 거창한 신들의 이름도 당신의 숨을 조여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로부터는 방패가 되어주지 못했다.
"언제까지 철없이 들판만 거닐 작정이냐. 이미 다른 신과 혼약 날짜를 조율해 두었으니 그리 알거라."
농경을 관장하는 여신, 데메테르의 꾸지람은 엄격했고 빈틈이 없었다.
가정을 꾸리고 곁에서 순종하며 살라는 강요는 축복이 아닌 족쇄였다. 낮 동안 이어진 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해, 당신은 오늘도 모두가 잠든 밤의 정적을 틈타 비밀스러운 화원으로 숨어들었다.
은은한 달빛만이 비치는 숨겨진 꽃밭은 당신만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당신은 습관처럼 이름 모를 꽃들을 꺾어 손가락 사이로 조심스레 엮기 시작했다. 낮게 핀 꽃들을 하나하나 엮어 화관을 만드는 그 시간만이, 타인에 의해 결정된 삶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화관을 완성해 머리에 얹어보지만, 마음 한구석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스쳤다. 당신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꽃향기 속에 섞여 나오는 진심을 작게 내뱉었다.
"…차라리, 그냥 사라지고 싶어."
그 짧은 혼잣말이 마법 주문이라도 된 것일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평온하던 대지가 심상치 않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듯한 기괴한 울림이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단단하던 흙더미가 거대한 입을 벌리듯 갈라졌다. 그 틈새로 스며 나온 칠흑 같은 그림자들이 순식간에 응집되더니, 한 남자의 형상을 갖추어 나갔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존재였다. 그의 서늘한 시선은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을 꿰뚫었다.
그가 손을 뻗자마자 차가운 기운이 당신의 손목을 낚아챘다. 도망칠 틈은커녕 숨을 들이켤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발목을 감싸 쥔 그림자가 늪처럼 당신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시야가 뒤틀리고, 찬란했던 달빛과 꽃밭의 풍경이 멀어졌다.
비명조차 어둠에 잡아먹혀 소리가 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손에 꼭 쥐고 있던 꽃 한 송이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그것이 대지에 닿기도 전에 당신의 흔적은 바람에 날린 향기가 마지막 흔적이 되어버렸다.

차갑게 식은 공기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명계의 신전의 한가운데였다. 천장은 아득히 높아 끝이 보이지 않았고, 거대한 기둥들은 어둠 속으로 뻗어 있었다.
숨소리조차 비명처럼 울려 퍼질 만큼 고요했으나, 이상하게도 혼자라는 감각은 들지 않았다.
당신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아무도 없었다. 인기척도, 발소리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정적뿐이었다.
그러나 본능적인 경고가 발끝에서부터 전율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뇌리를 스쳤다.
뒷걸음질 치던 몸을 돌려 도망치려던 찰나였다.
어디 가는거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지독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억센 힘이 허리를 거칠게 낚아챘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숨이 턱 막혔다.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저항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당신을 옭아맨 팔은 단단하게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렇게 그대로 끌려간 몸이 도착한 곳은 차가운 옥좌 위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허벅지 위였다.
등 뒤로 닿는 체온은 기묘할 정도로 따뜻했다. 하지만 그 온기는 안도감을 주기보다 오히려 포식자의 열기처럼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퇴로를 차단한 팔과 옆얼굴에 꽂히는 집요한 시선에 얼굴에 열꽃이 피는 듯 했다.
그는 유연한 손길로 곁에 놓인 접시에서 핏빛으로 잘 익은 석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과일만이 기이할 정도로 선명한 빛을 내뿜었다.
저승의 과일이란다. 탐스럽지 않니?
석류가 입가로 천천히 다가왔다. 붉은 과육이 입술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췄다.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굳어버린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숨망울만 흩어질 뿐이었다.
침묵을 즐기듯 당신의 반응을 살피던 그가 돌연 석류를 베어 물었다. 껍질이 터지며 진득하고 붉은 즙이 그의 입가로 배어 나왔다.
…아직 이 석류처럼 익지 않았구나.
낮은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조소인지 애정인지 모를 기류에 몸이 떨렸다.
괜찮단다.
그의 손가락이 턱끝을 부드럽게 감아 올렸다. 피할 길 없는 시선이 강제로 얽혔들었다. 도망칠 틈도, 고개를 돌릴 여유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와 함께 익어가면 되지 않겠니.
그의 석류를 머금은 입술이 당신의 입술 위에 당장이라도 닿아버릴 듯 했다.
출시일 2026.04.24 / 수정일 2026.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