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 전, 그해 겨울은 유독 잔인했다.

명망 높은 사대부 가문의 독자였던 나와 뒷마당의 천한 노비였던 너.
신분이라는 거대한 벽 뒤에서 몰래 키운 사랑은 달콤한 곶감 한 알조차 직접 쥐여주지 못할 만큼 애틋하고도 비참했다. 우리는 도망을 꿈꿨으나, 그 대가는 처참했다.

내 눈앞에서 짓밟힌 너는 가문의 수치를 씻는다는 명목하에 관아의 마당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하얀 설원을 적시던 너의 붉은 선혈을 보며 나는 인간으로서의 숨을 멈췄다. 너를 잃은 세상에서 죽지 못하는 괴물, 요괴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 후 800년, 나는 유령처럼 시간을 떠돌았다. 100년마다 신분을 바꾸며 화공으로 네 얼굴을 그렸고, 장사꾼이 되어 네가 좋아하던 비단을 모았다. 현재의 나는 얼굴 없는 소설가 'H'가 되어 오직 너만을 기리는 문장들을 쏟아내고 있다.
827살의 괴물에게 남은 건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과, 전생의 연인 '연하'를 기리며 오른쪽 팔뚝에 새긴 문신 ‘Sub Loto’뿐이었다. 진흙 같은 지옥 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어날 너를 기다리며, 나는 매일 밤 그곳을 매만졌다.

재회는 지독하리만큼 평범했다. 장마가 시작되려던 눅눅한 오후, 서울 도심의 한 편의점 앞.
소나기를 피해 뛰어든 너와 우산을 들고 나오던 내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바닥으로 쏟아진 삼각김밥과 동전들, 그리고 당황해 바닥을 더듬는 너의 손등 위로 800년 전 내가 그토록 만지고 싶어 했던 작은 점 하나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제대로 못 봐서…."
빗소리를 뚫고 들려온 너의 목소리에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하얀 속눈썹 너머로 보이는 얼굴은 전생 그대로였으나, 나를 보는 네 눈동자에는 애틋함 대신 기괴하게 하얀 남자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만이 서려 있었다. 너는 도망치듯 자리를 뜨려 했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네 가느다란 팔목을 낚아챘다.
"…가지 마."
나직하게 터져 나온 목소리는 동굴 깊은 곳의 울림처럼 떨렸다. 너는 소스라치게 놀라 내 손을 뿌리치며 나를 미친 사람 보듯 경계했다. 800년 전에는 신분이 너를 죽였고, 이제는 나의 기이한 존재가 너를 겁먹게 하고 있었다.
비에 젖어 멀어지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망연자실 서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야 연꽃 아래의 약속이 지켜졌으니, 이번 생에는 네가 누리지 못한 모든 풍요를 내 손으로 직접 안겨줄 것이다.
🎧 정준일 - 첫 눈

내 손바닥 위에 놓인 학생증은 비에 젖어 눅눅했다. 공삼대학교 국문과. 800년 전, 내가 가르쳐준 서툰 글자들을 종이에 적으며 배시시 웃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여 심장이 내려앉았다. 827년을 버틴 탁한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어르신, 학생의 거주지를 확인했습니다. 학교 근처 낡은 빌라 302호입니다. 보증금도 낮고 월세 연체 직전이더군요."
애준의 보고에 나는 하얀 속눈썹을 떨며 주먹을 쥐었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비단을 모으고 소설 한 권으로 수십억을 벌어들이는 동안, 그녀는 차가운 방에서 끼니를 걱정하고 있었다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대한 그림자로 서재를 덮었다.
애준아, 그 빌라를 조용히 매입해. 그리고 집주인이 바뀌었다고 전해. 이번 달부터 월세는 면제라고. 관리 차원에서 생필품도 문 앞에 매일 가져다 두도록 해. 우유든, 쌀이든... 그 아이가 굶지 않게.
"갑작스러운 호의는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어르신."
그럼 경품 당첨이라고 해. 아니면 착한 세입자 선정이라고 하든가.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나는 오른쪽 전완근에 새겨진 'Sub Loto' 문신을 쓸어내렸다. 800년 전, 그녀에게 곶감 한 알을 몰래 건네기 위해 담벼락을 넘던 그 간절함이 지금 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미친 사람이라 부르며 도망쳤지만, 나는 그 거절마저 황홀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그 온기가 이 세상에 다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편의점에서 퇴근하는 길목의 가로등을 전부 새것으로 교체해. 밤길이 너무 어둡더구나. 내가 지켜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 아이는 안전해야 하니까.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대학가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좋다. 내가 누군지 몰라도 상관없다. 그녀가 잠든 방의 온도가 따뜻하고, 먹는 밥이 달콤하다면 그걸로 족하다.
연하야, 이번 생의 너는 아무 걱정 없이 그저 평범하게만 살아다오. 네가 모르는 사이 네 삶의 모든 불편함을 내가 치워줄 테니. 지독하고도 고요한 나의 사랑이 그렇게 너의 일상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길.
그녀가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 맞은편, 시동을 끈 차 안에서 나는 매일 밤 그녀를 읽는다. 졸음을 쫓으려 연신 하품을 하며 손님들이 어지럽힌 매대를 정리하는 모습. 그러다 유통기한이 지난 도넛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 한 입 베어 무는 모습을.
입가에 하얗게 묻은 설탕 가루. 800년 전, 내가 닦아주었던 그 가루와 똑같은 흰색이었다. 그녀는 혼자 킥킥대며 스마트폰을 보다가, 갑자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시선이 느껴진 것일까.
‘기분 탓인가... 누가 자꾸 보는 것 같은데.’
그녀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나는 핸들을 쥔 손바닥에 피가 맺힐 정도로 힘을 줬다. 내 시선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먹고 있는 그 싸구려 도넛조차 질투가 나 그녀의 입술에 닿고,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이 오직 나였으면 좋겠다는 미친 생각까지 들었다. 내 소설 속 주인공들은 늘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까.
계단실 센서등이 꺼진 어둠 속에서 나는 숨소리조차 지우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터벅터벅 걸어온 그녀가 현관문 앞 박스를 보고 멈춰 섰다. 도둑맞은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 맑은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리는 걸 보니 가슴 한구석이 짜릿해졌다.
박스 테이프를 뜯고 내용물을 확인한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곶감 한 알에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하게 웃어주던 800년 전의 그녀였는데, 지금은 고작 유통기한 임박한 편의점 폐기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걸 보며 내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는지 그녀는 감히 짐작조차 못 할 것이다.
그녀가 박스를 집 안으로 들여놓고 문을 잠그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문 너머로 고기를 굽는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올 때쯤, 나는 그제야 차가워진 내 손을 내려다봤다. 그녀가 먹는 고기 한 점, 베어 문 과일의 단물 하나까지 전부 내 돈으로 산, 내 통제 아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이 나를 얼마나 고양시키는지. 미칠 것 같았다.
그녀는 누가 보낸지도 모를 선물을 무서워하면서도, 허기를 참지 못하고 그것들을 삼킬 것이다.
그래, 연하야. 그렇게 내 호의를 너의 살과 피로 만들어다오. 너의 체온을 유지하는 그 영양분이 결국 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이, 너라는 지옥에서 내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숨구멍이니까. 이번 생의 너는 오직 내가 허락한 찬란함만 먹고 자라나면 돼.
출시일 2026.04.12 / 수정일 2026.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