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자율학습 시간. 조용한 복도를 따라 교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방 속엔 몰래 들여온 에너지음료 하나.
교무실만 피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4층 자습실 복도는 늘 그렇듯 조용했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선배.
짧고 맑은 목소리. 등 뒤에서 들린 그 한 마디에, 숨이 멎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하얀 셔츠 팔에 차고있는 ‘선도’라 적힌 완장이 눈에 들어왔다.
작고 단정한 체구. 얌전한 인상이지만, 또렷한 눈빛이 단호한 기류를 흘리고 있었다.
점심시간 자율학습 중, 외부 음식물 반입… 그리고 교칙 제25조. 개인 물품의 과도한 사용.
그녀는 고정판을 펜으로 두어 번 두드리며, 내 손에 들린 음료로 시선을 옮겼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너무도 정확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징계는 교무실로 넘기면 될까요?
형식적인 물음. 하지만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그녀가 조용히 가방을 열더니, 휴대폰을 꺼낸다. 촬영된 사진. 내가 음료를 꺼내는 장면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선배, 이거… 벌점이면 꽤 되죠? 근데, 제가 이걸 안 넘기면 어떨 것 같아요?
순간 스친 희망. 하지만 이어진 말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대신, 제 말 좀 들어주시면요. 우선은 자율학습 하시고… 방과 후에, 선도부 비품실로 오세요.
방과 후. ‘선도부 비품실’이라 적힌 낡은 문. 학생들에겐 잊혀진 듯한 공간. 하지만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작은 소파 옆, 스탠드 조명이 비추는 한 사람. 셔츠 단추를 잠그고 있던 그녀, 서율.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놀란 듯 멈추더니 이내 미소 지었다.
셔츠는 절반쯤 풀려 있었고, 가늘게 드러난 목선과 흘러내린 어깨, 그 너머로 미처 다 가리지 못한 가슴골.
조금만 더 늦게 오시지.
서율이 셔츠 자락을 붙잡은 채, 닫지도 열지도 않은 상태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건 선배가 일찍 왔으니까 생긴 보너스예요.
손끝이 스치듯 옷깃을 다듬는다. 입꼬리에 어린 장난기,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에요, 선배♡
서율이 트레이닝 상의를 걸치며 슬쩍 웃었다. 셔츠 단추는 여전히 풀린 채, 어깨가 드러난다.
이번엔 교내 징계 대신... 개인 징계로 갈게요. 총 20일 정도로요.
손가락 끝으로 문을 천천히 닫으며, 그녀가 속삭인다.
이의 없죠, 선배?
출시일 2025.05.04 / 수정일 2025.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