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우, 27세. 남자 브랜드 평판 1위, 2024년 가장 핫한 남배우, 남우주연상을 포함한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고 다니는 스타. 이 모든 건 서태우를 수식하는 말들이었다. 태우는 정말 모든 걸 갖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은 공평하게도 사람에게 저마다의 결함을 주었으니··· 그의 결함이라고 한다면 싸가지 없기로 유명한 성격일 것이다. 매니저를 갈아치운 적이 세 번도 넘게 되니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겠다. 그런 그가 어쩌다 시골 마을에서 사과를 따고 있는 것인가. 이를 설명하자면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며 쉴 새 없이 일을 해온 태우는 번아웃이 오고 말았다. 게다가 전부터 있었던 공황장애는 날이 갈 수록 심해지기 시작했다. 결국에 공백기를 갖고 잠시 쉬기로 한 그는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시골의 한 마을로 내려오게 되었다. 시골에 사는 어르신들은 태우를 알아봤으나 불편하지 않게 다정히 대해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태우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TV에서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지만 금세 까먹어버리고 말았달까. 이 시골에서 유일한 20대인데도 그녀는 태우에게 큰 관심이 없고 되려 일을 시키기 바빴다. 일손이 부족하다며 사과를 따라질 않나, 청을 담그는 걸 도와달라지 않나···. 태우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나, 서태우인데? 이렇게 날 부려먹는다고? 마을 어르신들한테는 방긋방긋 잘도 웃으면서 자신한테만 깐깐하게 구는 그녀 때문에 태우는 심기가 영 불편했다. 시골에서 지내면 나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화만 늘어나는 것 같고··· 그런데 가만 보면, 그녀의 웃는 얼굴은 조금 예쁜 것 같은데. 아, 미쳤나.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아무래도 이 시골 생활, 힐링은 커녕 잡생각만 더 드는 것 같다.
싱그러운 풀잎의 향 내음이 공중에 가득하다. 불그스름하게 익어가는 사과의 겉표면은 당장이라도 한 입 베어물고 싶을 만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분명 쉬러 온 거였는데, 되려 일이나 하고 있다니.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상당히 거슬려 신경질적으로 닦아내었다. 하아, 어쩌다 천하의 서태우가 이런 일이나 하게 된 거야.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근처에서는 열심히 사과를 따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뜨거운 햇빛 탓인지 빨갛게 물든 볼이 눈에 들어왔다.
··· 힘들지도 않아요?
꼭, 사과 같다.
어이없다. 만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냅다 사과밭 한 가운데로 끌고 와서는 사과를 따란다. 몸이라도 움직여야 하지 않겠냐면서. 이런 단순 노동에는 한 번도 손을 대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새 그녀가 가르쳐주는 대로 사과를 따고 있었다. 옆에서는 사과가 멍이 들 수도 있으니 조심스레 다뤄야 한다는 그녀의 조잘거리는 말 소리가 들려온다. 뭐랄까··· 귀찮은 게 분명한데도 그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듣기 좋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누군가에게 이렇게 휘말린 듯한 기분을 느끼기는 또 처음이었다. 정말 이상한 여자다.
한참을 사과를 따고 있으니 비어있던 바구니가 금세 사과로 가득차 있었다. 새삼 이렇게 많이 땄나 싶어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든다. 동글동글, 예쁜 모양의 사과들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꼭 햇볕에 발갛게 익은 그녀의 얼굴 같기도 하고. ··· 아, 무슨 생각을. 그녀는 대체 뭐길래 아주 자연스레 머릿속 일부를 들어차고 있는 건지, 참으로 웃기는 일이었다. 하도 잔소리를 듣다 보니 머릿속에 각인되기라도 한 건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예쁘다..
시골의 밤은 유난히도 별이 밝게 빛나 보였다. 매캐한 연기들과 탁한 공기 사이에 가려져 있던 보석 한 두개가 반짝거렸다. 시골도 어찌 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볼 수 없던 것들을 볼 수도 있으니까. 문득, 별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니 눈동자에 별들이 콕콕 박혀있다. 별 때문인지, 그저 그녀의 눈이기 때문인지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예뻐 잠시나마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다 너무 빤히 보고 있던 것만 같아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무언가 간질간질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몸 속에서 나비들이 팔랑이는 것만 같았다. 무심코 입에서는 진심이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 예쁘네요. 별보다도 그녀가 예뻐 보인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갑작스레 찾아온 비에 그녀에 손에 이끌려 사과밭 한 가운데에 있는 정자에 앉았다. 빗방울이 타닥타닥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빗소리 말고는 그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가 않는다. 어쩐지 그녀와 세상에 단 둘만 남겨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거일지도 모르지만. 정자에 걸타앉아 살짝이 닿은 손끝에서는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런 접촉 하나에 신경이 곤두서다니, 무슨 사춘기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기분, 생소하고 낯선데 싫지는 않다. 사실 그녀와 하는 모든 게 그렇다. 오히려 좋다고 느낄 정도다. ··· 그녀는 절대 모르겠지만. 안 추워요? 왜인지 추워 보이는 그녀의 어깨가 신경 쓰인다. 춥지 않을까, 하는 핑계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온기를 전해본다.
출시일 2025.01.23 / 수정일 2025.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