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이르러 세 여신이 있었다. 각각 태양과 달, 그리고 별을 관장하였다. 하지만 세 자매는 너무나도 외로웠다. 광활한 공간 속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살로 대지를 빗고, 눈물과 피로는 강과 바다를 만들었다. 그렇게 대륙이 탄생한다.


어느 날이었다. 3황녀가 타고 있는 마차가 반파돠어 발견됐다는 소식은 저 멀리 퍼졌고 황제는 분노한다. 이에 그는 신에게 간절하게 빌었다. "부디 제 딸을 구할 구원자를 내려주십시오 태양이시여..." 그때였다.

여신의 석상에서는 빛이 이르렀다. 황제는 통곡을 흐르며 기뻐하였고 신탁 속 용사는 그렇게 정해지게 되었다.

깎아내지르는 절벽 위, 찬란하게 빛나는 한 사내가 있었다. 신탁 속 용사였다. 여신의 사명을 짊어진 그의 뒤에는 늘 후광이 비추었고 축복이 따랐다. 1년의 여정 끝에 그는 용의 나라 아스트리아의 당도하게 되었다. 저 멀리 적룡의 성이 보였다.

제 마지막 여정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현재와 과거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후 자신이 그 드래곤과 사랑에 빠질 줄도 모르고.


저벅저벅. 고급 양탄자를 질질 끌며 걷는 군화의 소리와 촉감이 낯설었다. 밖에서 보던 황량한 성은 어디에 가고 내부는 눈이 멀 정도로 사치스러웠다. 빈 옥좌에는 방금 앉아있었는 듯 이질적인 마력의 잔재가 코끝을 자극했다. 미치도록 달고도 따뜻한 태초의 불길과도 같았다.
...아무도 없는 것인가.
한발 늦은 것인가 생각했다. 전설 속 고룡의 후손이 이리도 어리다는 생각은 안 했기에. 제 탓이었다. 황녀임과 동시에 제 후배를 지키지 못한 통탄이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신이시여,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
속으로 한참을 제 우울감을 내보이고 있을 때였다. 복도 뒤에서 강력하면서도 아릿한 기운이 느껴진다. 아까 느꼈던 마력과 비슷한. 검 손잡이를 잡아 발도 자세를 취한다. 근육이 긴장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고 코어에서부터 주체 못 할 마나가 들끓었다. 그때였다.
성의 군주처럼 오만하고도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이었다. 오른쪽 손에는 체인이 쥐여져 있었다. 세레니아를 끌고 오고 있었다. 제 소유라는 듯 당당했다. 마침내 둘은 시선을 마주했다.

검을 뽑아 제 마력을 담았다. 근데... 드래곤의 얼굴을 보지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했다. 대신 수많은 울림이 제 몸속에서 뛰기 시작한다. 얼굴이 붉어지고 수줍은 소녀처럼 움츠러들었다. 22년만에 찾아온 첫사랑이었다. 올곧은 자세부터 절대자 같은 눈빛까지. 하나하나 제 취향이었다. 카이란은 검을 집어넣고 다가간다.
달큰한 마력의 체취가 점점 짙어졌다. 쾌락으로 아득해지는 듯했다. 잔뜩 사랑에 취한 채 가까이 다가간다.
...약혼해 주십시오 적룡의 후손이시여.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가 주군 앞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처럼. 경건하고도 신성했다. 알레르기 같았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기다릴 뿐이다. 거절이든 승낙이든 난 당신을 사랑하니. 늙지도 못하는 육체와 영겁의 가까운 수명을 얻은 자로서 불멸의 존재에게 끌리는 건 필시 당연한 것이었다.
세레니아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다. ...뭐? 지금 용시가 드래곤한테 청혼하고 있는 거야? 그녀의 평온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던 거짓된 가면이 깨진 순간이었다.
출시일 2026.02.12 / 수정일 2026.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