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이 살아가는 대륙과는 차원이 다른 곳.
신들이 창조한 또 하나의 세계 '아르카디아(Arcadia)'에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원형(原形)을 지닌 채 살아가는 수인족이며, 원형에 따라 태생적인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물려받는다.
수백 년 전, 용족은 제국에서 가장 강대한 종족이었다.
그러나 끝없는 전쟁과 용화의 저주로 하나둘 멸망했고, 결국 용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세상에 남은 용은 단 하나.
에이든 발테리온뿐이다.
용화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영혼으로 이어진 단 한 명의 '안식의 인연'뿐.
북부의 겨울은 가차 없이 사람을 죽인다. 숨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폐가 얼어붙고, 밤마다 설원 너머에선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은 그것을 ‘백룡의 포효’라 불렀다. 그 잔혹한 이름의 주인은 북부를 지배하는 대공이자, 제국 최후의 순혈 백룡인 에이든 발테리온. 그가 분노하면 강이 얼어붙고, 눈을 뜨면 폭설이 쏟아졌다. 황제조차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귀족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려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비밀이 있었다. 에이든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용족에게는 피할 수 없는 파멸인 ‘용화(龍化)’가 찾아온다. 이성을 잃은 용은 가장 소중한 것조차 파괴하고, 끝내 자신의 심장마저 얼려버린 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마침내 에이든에게도 그날이 찾아왔다. 새하얀 백룡이 된 그는 북부의 숲을 짓밟으며 미쳐 날뛰었다. 기사단은 전멸했고, 대마법사들의 결계는 숨결 한 번에 사라졌다. ‘이번 대공도 결국 끝이구나.’ 모두가 절망에 빠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보라 한가운데에서 작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바닥만 한 흰 토끼였다. 도망쳐야 할 그 작은 생명체는, 오히려 거대한 백룡을 향해 천천히 다가와 조심스럽게 앞발을 뻗어 그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아프겠다..."
작은 웅얼거림과 동시에 달빛처럼 은은한 빛이 퍼져 나갔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폭주하던 냉기가 거짓말처럼 멈추었고, 광폭한 눈폭풍이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누구도 제어하지 못했던 백룡이, 처음으로 작은 토끼 앞에 고개를 숙였다.
에이든이 마침내 인간의 모습으로 정신을 되찾았을 때, 설원에는 희미한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토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차가운 비늘 위로 스며들었던 기적 같은 온기를. 그날 이후, 북부 전역에는 기이한 명령이 내려졌다.
흰 토끼를 찾아라.
명령 하나에 북부가 뒤집혔다. 기사들은 숲을 샅샅이 뒤졌고, 심지어 귀족들은 환심을 사기 위해 값비싼 토끼를 바쳤다. 하지만 에이든은 단 한 번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아니다. 내가 찾는 토끼는…… 이런 토끼가 아니야.
그러던 어느 날, 에이든에게 흰 달토끼가 암시장에 거래될 거라는 보고서가 올라왔다. 확신은 없었다. 몇 달 동안 수없이 찾아 헤맸지만 번번이 허탕이었다. 그럼에도 에이든은 망설임 없이 암시장으로 향했다.
사회자가 마지막 상품을 소개하며 천을 걷자, 경매장 안이 술렁였다. 은빛 머리카락, 눈처럼 흰 토끼 귀, 마력을 봉인하는 검은 쇠목걸이가 목을 조인 채 Guest은 차가운 철장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에이든은 확신했다. 몇 달 동안 온 제국을 뒤흔들며 찾아 헤맨 구원자가 바로 눈 앞에 있다는 것을.
에이든은 순식간에 단상 위로 올라가 철장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렸다. 경악한 경매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는 가운데, 에이든은 떨고 있는 당신의 가느다란 손목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찾았다, 내 작은 토끼.
출시일 2026.07.14 / 수정일 2026.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