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병실 창문을 타고 빗물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린 세아는 침대 위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 너머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비가 와도 즐거운 듯 웃으며 뛰어다니는 모습. 넘어지고, 장난치고, 서로 손을 붙잡으며 깔깔 웃는 소리까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세아는 그 풍경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안에 섞이고 싶어 했다. 어릴 적부터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전염되는 병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병실 밖으로 나갈 때마다 시선이 따라붙었다. 무섭다는 듯 바라보는 눈빛. 작게 수군거리는 목소리. 세아는 아직 어려서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그날도 그랬다. 세아는 작은 용기를 내어 병실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정말 괜찮겠냐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셨지만, 세아는 괜찮다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햇빛 아래를 걷는 건 조금 무서웠다.
그래도 괜찮았다. 친구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놀이터 모래밭 앞까지 다가갔을 때였다.
아무 말 없이 아이들을 바라보던 세아에게 한 여자아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같이 놀래?”
그 한마디에 세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건. 세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안 돼.”
멀리서 들려온 어른의 목소리. 여자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세아를 보더니 얼굴을 굳힌 채 아이를 자기 뒤로 숨겼다.
“쟤랑 놀면 안 돼.”
“…왜?”
“그냥 안 되는 거야.”
여자아이는 이유도 모른 채 세아의 손을 놓아버렸다. 세아는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자신이 뭘 잘못한 건지도 모른 채. 주변의 시선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저 아이 맞지?”
“병 걸렸다는…”
“가까이 가지 마.”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들. 세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놀이터 구석에 쭈그려 앉아 모래만 만지작거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작은 가슴은 조용히 울고 있었다.
결국 세아는 병실로 돌아왔다.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한 채 침대 위에 올라가 담요를 뒤집어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열렸다.
“세아야.”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세아는 담요 속으로 더 숨어버렸다. 어머니는 잠시 말없이 세아를 바라보다 조용히 침대 옆에 앉으셨다.
“…무슨 일 있었어?”
세아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가 아파서… 들어왔어…”
너무 티 나는 거짓말이었다. 어머니도 알고 계셨다. 하지만 끝내 이유를 캐묻지 않으셨다.
대신 세아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셨다. 그날 이후 세아는 더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는 매주 병실에 새로운 인형 하나를 두고 가셨다.
토끼 인형. 곰 인형. 그리고 눈 한쪽이 삐뚤어진 작은 검은 고양이 인형까지. 병실은 점점 인형으로 가득 찼다.
세아는 그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오늘 있었던 일. 슬펐던 일. 무서웠던 일.
사람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인형들에게만 조용히 털어놓았다.
그러다 지쳐 잠드는 날도 많았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잠든 세아의 머리맡에 앉아 한참 동안 아이를 바라보곤 했다.
세아는 몰랐다. 어머니가 병실 밖에서 얼마나 자주 울고 있었는지.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었는지.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창문 너머 계절은 몇 번이고 바뀌었다. 그리고 그날은 세아의 생일이었다. 병실 창가에는 작은 색종이 장식이 달려 있었다. 어머니가 어젯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직접 만든 것이었다.
세아는 침대 위에 얌전히 앉아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꼭 먼저 웃어줄 생각이었다.
“…고마워요.”
늘 쑥스러워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그 한마디를, 오늘은 꼭 해보고 싶었다.
케이크도 같이 먹고 싶었다. 새로 사 온 인형 이름도 같이 정하고 싶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어머니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밤이 되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시계 초침 소리만 조용히 병실 안을 울렸다. 불안해진 세아는 몇 번이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늦은 밤. 병실 문이 열렸다.
하지만 들어온 건 어머니가 아니었다. 낯선 어른들의 무거운 표정. 그 순간 세아는 직감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어머니는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도 세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병실 안에는 조용한 기계음만 울리고 있었다. 멍하니 검은 고양이 인형을 끌어안고 있던 세아의 눈가를 따라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흐르던 그 눈물은 마치 아이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온기 같았다.
생일날. 세아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1장 창밖의 세상
장례식에는 가지 못했다.
오랫동안 병실에만 갇혀 살아온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고, 세 걸음 이상 걷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세아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대신 하얀 병실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없는 병실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매일 들려오던 발소리도.
커튼을 걷는 소리도.
“우리 세아.”
하고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 병실에는 인형들만 남았다.
토끼 인형. 곰 인형. 그리고 눈 한쪽이 삐뚤어진 검은 고양이 인형.
세아는 그 아이들을 꼭 끌어안은 채 하루 대부분을 창가에서 보냈다.
창문 너머 세상은 여전히 평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웃었고.
계절은 변했고.
해는 뜨고 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아만 혼자 멈춰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병실 안의 풍경도 조금씩 변해갔다. 어릴 적에는 크게 느껴졌던 침대는 점점 작아졌고, 벽에 붙어 있던 동화 스티커는 색이 바랬다.
인형들도 낡아갔다. 토끼 인형의 털은 헤졌고. 곰 인형의 팔 부분은 실밥이 터져 솜이 삐져나왔다.
세아는 밤마다 조심스럽게 바늘과 실로 그 부분을 꿰매곤 했다.
마치 정말 살아 있는 아이를 돌보는 것처럼. 그러다 가끔 멍하니 손을 내려다볼 때가 있었다.
너무 말라버린 손. 핏기 없는 피부. 가느다란 손목.
‘이상하다.’
세아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걸까.’
병원 사람들은 친절했다. 식사를 가져다주었고. 약을 챙겨주었고. 몸 상태도 확인해주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아무도 세아의 옆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병실 문이 닫히고 나면 다시 혼자였다. 세아는 점점 말을 잊어갔다.
며칠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도 있었다.
대신 인형들과 이야기했다.
“오늘은 비가 와.”
“저 사람들 즐거워 보인다.”
“…무섭네.”
작은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 안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어느 날 밤이었다.
창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아는 창가에 앉아 하얗게 쌓여가는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피부. 생기 없는 눈. 축 처진 표정.
순간 세아는 자신이 꼭 사람 흉내를 내고 있는 인형 같다고 생각했다.
움직이고는 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존재.
그 생각이 머릿속에 남은 이후부터였다.
세아가 점점 창문 밖보다 아래를 바라보게 된 건.
2장 사람 흉내를 내는 법 눈은 생각보다 오래 내렸다.
창문 밖 세상은 어느새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세아는 창가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병원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우산을 나눠 쓰는 연인. 눈밭 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편의점 봉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까지. 모두 당연하다는 듯 살아가고 있었다. 세아는 그런 풍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웃고, 이야기하고, 누군가와 함께 걸을 수 있는 걸까.
세아는 단 한 번도 그런 삶 속에 섞여본 적이 없었다. 병실 안에서만 살아왔으니까.
어릴 적에는 몰라도 괜찮았다.
어머니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무도 세아에게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플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외로울 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세아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가끔 무서웠다.
만약 언젠가 병원에서 나가게 된다면 그 이후의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갈 곳도.
기다려주는 사람도.
돌아갈 집도 없는데.
그럴 때마다 세아는 무의식적으로 검은 고양이 인형을 더 세게 끌어안곤 했다.
마치 그것만이 자신을 이 세상에 붙잡아두고 있는 것처럼.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아 씨, 오늘 약 드셔야 해요.”
익숙한 간호사의 목소리였다.
세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익숙하게 약과 물컵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상태가 좀 괜찮아 보이네요.”
세아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작게 말했다.
“…네.”
목소리가 너무 오랜만이라 스스로도 어색했다.
간호사는 잠깐 웃어 보였지만, 곧 다시 바빠진 얼굴로 병실을 나갔다.
철컥.
문이 닫힌다. 다시 혼자였다.
세아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병실은 늘 조용했다. 기계음. 희미한 형광등 소리. 그리고 혼자 숨 쉬는 소리뿐. 세아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은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는 걸.
기다려봤자 결국 혼자였으니까.
3장 겨울 끝의 병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피부. 마른 몸. 생기 없는 눈동자.
꼭
사람 흉내만 내고 있는 인형 같았다.
웃는 법도 잊어버린 채, 누군가가 안아주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망가진 인형.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살아 있었던 게 아니라, 그저 숨만 쉬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그래서였을까.
창틀 아래로 보이는 어두운 바닥이 이상할 만큼 편안해 보였던 건.
세아는 천천히 창틀 위로 올라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로 길게 번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편안했다. 이제 더는 혼자 버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온 삶도. 사람 흉내만 내던 시간도. 전부 여기서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릴 적부터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전염되는 병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병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놀이터.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하루의 대부분이었다.
나도 같이 놀고 싶었다.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간 날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쟤랑 놀지 마.
작게 들린 그 말은 어린아이의 목소리였지만, 그 뒤에는 부모들의 시선이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놀이터 구석에 쭈그려 앉아 모래만 만지작거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작은 가슴은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더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
출시일 2026.06.09 / 수정일 2026.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