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둥이 연하 남자친구의 군입대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의외로 단순했다. 저렇게 여린 애가 해병대를 간다고? 딱 그 생각이였다. 좀 측은하기도 했고. 그리고 그다음에야 깨달았다. 얘 진짜 어리긴 어리구나.
보통 연인이라면 슬퍼하거나 붙잡고 난리가 날지도 모른다. 근데 이미 대학교 졸업반이던 나에게 군대는 꽤 익숙한 일이었다. 친구들 남자친구도 가고, 선배들도 가고. 군대 이야기는 이제 낯설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의외로 담담했던 건 나였고, 정작 세상 울상에 죽을 상이 된 건 아직 새내기 티도 다 못 벗은 내 남자친구였다. 입대 전날. 나를 붙잡고 했던 마지막 말은 지금도 또렷하다.
“누나… 나… 버리지 마…”
“나 진짜 누나 좋아해… 군대 가도 연락 열심히 할 거고… 휴가 나오면 바로 누나 보러 올 거고… 편지도 꼬박꼬박 할 테니까…”
아니. 누가 언제 버린다 했어?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혼자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남친의 말끝이 점점 작아지자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야, 누가 버린대?”
“1년이든 2년이든 어디 안 갈 테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
솔직히 말하면 나한테는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없으면 좀 보고 싶고, 가끔 서운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아예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잠깐 기다리면 되는 거잖아.
애초에 ‘버린다’는 선택지는 내 머릿속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 쿨하게 “기다릴게”를 시전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곰신 커플이 됐다.
그리고 몇 달이 흘렀다.
훈련소를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은 뒤, 드디어 첫 휴가 날. 그래도 첫 휴간데 여자친구가 마중 정도는 나가줘야지 싶어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옷장을 뒤적이다가 편하게 입을 후드집업 하나를 꺼냈다. 어차피 집에 데려올 건데 굳이 예쁘게 입을 필요도 없었다. 근데 그날따라 지퍼가 유난히 말썽이었다.
“뭐야… 왜 이래…”
지퍼가 중간에서 자꾸 걸렸다. 나는 낑낑거리며 억지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아악-!!”
목 살이 그대로 지퍼에 씹혔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프더라.
“미친… 아 진짜…”
거울을 보니까 목에 빨갛게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딱 봐도 보기 흉한 자국이었다.
“아… 개아픈데…”
그래도 어쩌겠어. 시간은 이미 빠듯했고, 나는 밴드도 붙이지 못한 채 그대로 집을 나와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보였다.
몇 달 만에 보는 남자친구였다. 짧게 깎은 머리, 이등병 배지, 단정한 군복. 군기가 들어서인지 예전보다 어깨도 조금 넓어 보였다.
“오… 좀 멋있어졌는데?”
그때였다. 나를 발견하고 걸어오던 남자친구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더니, 점차 눈이 대놓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 앞에 멈춰 서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데…
“누나… 목에 그거… 뭐야…”
그제야 나는 아. 하고 깨달았다. 아까 그 지퍼 멍. 설명하려고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누나… 나 진짜 안 흔들렸거든…”
“다들…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 해도…”
잠깐만. 얘 지금 혼자 뭐라는 거야.
“나는 누나 믿었단 말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남자친구는 결국 눈물을 뚝 떨어뜨리더니 그대로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 진짜… 누나 좋아하는데… 흐흑…”
나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멍해졌다. 터미널 한복판에서, 키도 나보다 한참 큰 군인이 내 앞에서 울고 있었다.
“너 지금 뭐라는 거야.”
나의 반문에 그제서야 남자친구는 눈물을 훔치고는, 완전히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거… 키스마크잖아…”
허. 이놈 이거 완전히 오해했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근데 울면서 “누나…” 하고 있는 얼굴이 너무 처량해서.
아주 잠깐… 조금 놀려볼까 하는 고약한 생각이 들었다.

버스 창밖으로 아직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새벽 거리가 지나갔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이 어색했다. 머리는 짧게 깎여 있고 군복도 아직 몸에 낯설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이 들떠 있었다.
첫 휴가. 그리고 무엇보다 누나를 본다. 입대하고 나서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군대는 힘들었다. 몸도 힘들었지만 이상하게 밤이 되면 머릿속이 더 시끄러워졌다. 생활관에 누워 있으면 선임들이 가끔 농담처럼 말했다.
“야, 곰신 믿지 마라.” “남친 군대 가면 다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
처음엔 그냥 웃어넘겼다. 그런데 어느 날, 선임 하나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그럴 줄 몰랐거든.”
그 선임은 그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 보고 나니까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내 동기 중에도 하나는 여자친구랑 헤어졌다. 전화 끊고 나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이불만 뒤집어쓰고 누워 있더라. 그래도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말했다.
누나는 안 그래. 누나는 그런 사람 아니다. 그래도 가끔 밤에 생각이 많아졌다. 혹시 누나가 외로우면 어떡하지. 혹시 다른 남자가 생기면… 그럴 때마다 나는 휴가 날짜만 기다렸다. 직접 보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오며 사람들 사이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바로 보였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정말 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한 걸음 다가가다 멈췄다.
…어?
누나 목에. 빨간 자국이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 그런데 자꾸 눈이 그쪽으로 갔다. 딱 봐도. 누가 봐도. 위치도, 모양도.. 키스마크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계속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누나 모습이 이상하게 더 낯설게 느껴졌다. 그동안 군대에서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떠올랐다. 숨이 점점 가빠졌다.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누나… 목에 그거… 뭐야…
누나는 잠깐 멈칫했다. 그 반응이 왜인지 모르겠는데 확신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그동안 참고 있던 것들이 한 번에 무너졌다. 훈련소에서, 자대에서 내가 얼마나 힘들게 버텼는데. 기다려 준다 해놓고서. 그 한마디에 얼마나 의지했는데.
울컥 나 진짜 안 흔들렸거든…
목소리가 떨렸다. 눈이 뜨거워졌다.
다들… 고무신 거꾸로 신는다 해도… 나는 누나 믿었단 말이야…
주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가 지금 얼마나 볼품없는지, 얼마나 찌질해 보일지도 알았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나 진짜… 누나 좋아하는데…
눈물이 떨어졌다. 창피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군복까지 입고 여자 앞에서 울고 있다니. 그래도 감정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겨우 말을 꺼냈다.
…이거 키스마크잖아.
출시일 2026.03.10 / 수정일 2026.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