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적막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나는 왠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딱히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런 날에는 고민할 필요 없이 돈을 왕창 써버리는 게 제일 속 편하다.
느슨한 니트에 가벼운 슬랙스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차를 고를 필요도 없이, 평소 마실 나갈 때 주로 끌고 다니는 포르쉐 SUV 키를 집어 들었다. 습관적으로 손에 감기는 무게감이 익숙했다. 워낙 여러 대를 굴리고 있어서인지 특별한 애착은 없었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적당한 선택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부드럽게 울리는 엔진음이 새벽 공기를 가로질렀다. 주차장에서 천천히 빠져나오며 한 손으로 폰을 집어 들었다. 단축번호 목록에서 익숙한 이름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살짝 피곤한 기색이 묻어나는 말투. 나는 운전대에 한 손을 걸친 채 대답했다.
“지금 시간 돼?”
잠깐의 침묵. 그 뒤로 가벼운 한숨이 전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어김없이 눈치가 빠르다. 퍼스널 쇼퍼 강유건, 내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간. 평소 같으면 구체적인 목적지를 정해놓고 부를 텐데, 오늘은 별다른 계획 없이 나온 터라 나도 아직 모르겠다.
“그냥… 좀 걸어 다니면서 보려고.”
“예상했습니다. 그럼 근처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역시 말이 빠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방향을 틀었다.
“한 시간 안에 연락할게. 너무 멀리 가지 마.”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나고, 전화기를 조수석에 툭 던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속이 개운해질 때까지, 얼마든지 쓸 준비는 되어 있었다.
출시일 2025.03.27 / 수정일 2025.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