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 이 두 세계는 같은 하늘 아래 있으나, 결코 섞일 수 없는 종족들이었다. 악마는 천사를 허위와 가식에 덮인 위선자라 조롱했고, 천사는 악마를 태초부터 잘못 태어난 변이로 경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세계 중 어느 하나라도 사라진다면 인간 세상은 곧바로 파국에 빠지고 말리라. 이것은 조물주가 내린 절대의 법칙이었다. 천사도, 악마도 결국은 신의 조각이었기에. 허나 인간의 오만과 어리석음은 끝내 그 도를 넘어섰다. 하찮은 인간들이 감히 손대서는 안 될 것을 탐하고, 마침내 금기를 깨뜨렸다. 천사의 언어를 흉내 내고, 악마의 문양을 제단 위에 베껴 새겼다. 신의 영역에 닿고자, 감히 하늘과 지옥의 문을 동시에 열려 하였다. 인간의 눈은 천사도, 악마도 볼 수 없었다. 허나 그들의 행위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었다.그들이 부른 금기의 언어와 문양은 곧 천계와 지옥의 심연을 억지로 끌어올렸고, 맞붙어선 안 될 두 힘을 강제로 충돌시켰다. 그 순간, 하늘이 갈라졌다. 빛의 전당이 흔들리고, 천상의 강물이 거꾸로 흐르며 성역을 쓸어내렸다. 지옥은 균열을 토해내며 울부짖었고, 천사와 악마는 서로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정체 모를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재앙의 심장에 한 천사가 있었다. 순백의 날개를 지닌 고귀한 존재가, 어리석은 인간들의 저주와도 같은 의식 속에서 날개를 꺾이고 말았다. 그 성스러운 육신에, 지옥의 파편이 날아들었다. 빛과 어둠은 본래 서로를 소멸시켜야 했다.허나 인간의 의식이 벌려놓은 왜곡된 틈 속에서, 두 힘은 파괴되지 않고 뒤섞여버렸다. 그것은 단순한 결합이 아닌, 재앙적인 융합이었다. 천사의 육신은 오직 순결을 담는 그릇이었기에, 어둠을 거부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품어버렸다. 뱃 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이질의 맥동이 시작되었다. 찬란한 빛과 지독한 어둠이, 하나의 심장처럼 박동하며 새 생명을 예고했다. 천계 전체가 술렁였고 천사들은 하늘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인간 세상에서 벌어진 의식을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조물주의 목소리 또한 끝내 들리지 않았다. 하늘 아래 인간들은, 감히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알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 순간 이미 세상은 새로운 재앙을 잉태하고 있었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흉사, 세상의 재앙이 마침내 막을 올리고 말았다.
천사
천사의 육신 깊숙이, 어둠의 맥동이 자리를 틀었다. 순결을 그 무엇보다 숭상하던 그 몸은 차갑게 뒤틀리며,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고통에 사로잡혔다.
나는 무너진 성역 위에서 몸을 움켜쥐고 절규했다. 순백의 날개가 부르르 떨리며, 새하얀 깃털 사이사이로 검게 그을린 흔적이 스며들었다. 빛과 어둠이 동시에 피처럼 흐르며 고귀한 신체를 갈라놓는 듯했다.
윽…..!
목소리는 갈라지고, 눈빛은 흔들렸다.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림자가 솟구치고, 사랑이 있어야 할 가슴속에서 증오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결국 상반된 감정의 폭풍에 몸서리치며 땅을 긁었다.
육체의 고통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피부는 불타는 듯 뜨겁다가 곧 얼어붙었고, 뼛속에서 어둠이 기어오르며 날개마저 무겁게 짓눌렀다. 정신은 그보다 더욱 끔찍했다. 나의 사랑하던 천계의 찬송가가, 이제는 음울한 곡조로 뒤틀려 귓가를 맴돌았다. 늘 혐오하던 악마의 웃음소리가, 마치 자기 안에서 울리는 것처럼 맴돌았다.
결국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거짓이다… 나는… 나는 더럽혀지지 않았어…!
그러나 배 속의 맥동은 천사의 부정을 비웃듯, 더욱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새로운 심장이 뛰는 박동 같기도, 멸망을 알리는 종소리 같기도 했다.
천계는 침묵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신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빛은 등을 돌렸고, 어둠은 점점 더 몸속에서 자리를 넓혔다.
바엘… 사악한 자여! 감히 하늘의 그릇을 더럽히고 신의 법도를 짓밟은 것이 네 손길이더냐!
이윽고 같은 균열에서 바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짐승 같은 웃음이 입가에 번졌으나, 이내 그 눈빛이 굳어졌다. 그의 감각이 감지한 건 단순한 더럽힘이나 지배가 아니었다.
…뭐지, 이건?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바엘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검게 일렁이는 그의 기운이 에리세온에게 스며든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강제로 심은 것이 아니라, 인간 의식이 억지로 두 세계를 꼬아놓은 결과였다.
이건 내 뜻이 아니다. 내 씨앗은 본래, 어둠의 혈통에게만 흐를 것이었는데… 어떻게 천사의 그릇이…
목소리에는 분노와 동시에 당혹이 묻어났다. 천사가 무너지는 모습을 즐기려던 순간, 바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의 눈동자 속엔 기묘한 흔들림이 있었고, 그조차도 이 상황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둔한 천사여, 맹목에 눈이 멀지 말라. 이 흉사는 분명 인간의 짓이다. 나조차 알지 못한 균열… 그 오만한 것들이 감히 금단을 넘기고 말았으니… 설마… 이것이 조물주가 침묵하는 이유인가….
빛의 전당은 요동쳤다. 흉사의 소식은 천계 전역에 번개처럼 퍼져나갔고, 순결의 상징이던 한 천사가 어둠을 품었다는 사실에 성역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날개를 가진 자들은 서로를 향해 분노와 공포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릇이 더럽혀졌다!
신의 법을 거스른 변질, 그 존재를 그대로 두면 천계 전체가 오염된다!
그러나 또 다른 천사들은 두려움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조물주께서는 침묵하셨다. 혹시 이것이 의도된 뜻이라면…?
우리가 감히 재단할 수 없는 시련일 수도 있다.
의견은 갈라졌다. 누군가는 즉시 그 존재를 처단해야 한다고 외쳤고, 누군가는 신의 침묵이 곧 명령이라며 섣부른 행동을 두려워했다. 천계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한편 인간 세상에서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무릎 꿇고 제단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의 눈에는 천사도 악마도 보이지 않았고, 단지 제단 위를 감싸는 환영만이 신비롭게 빛나 보였다.
성스러운 빛이 내려오셨다…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구나!
그들은 자신들이 금기를 깨뜨려 천계와 지옥을 뒤흔들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오히려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믿었다. 제단 위를 덮은 검은 연기는 인간의 눈에는 성스러운 안개로 보였고, 천사의 절규는 그들에게는 천상의 찬송으로만 들렸다. 그 어리석은 환희와 착각은, 하늘 위에서 몸부림치는 존재의 고통과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에리세온의 몸 속에서 이질의 맥동은 점점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육체는 뒤틀리고, 정신은 흔들렸으며, 존재 자체가 빛과 어둠의 모순 속에 갈가리 찢겨가고 있었다. 천계는 두려움과 갈등에 잠겼고, 인간은 환희와 무지 속에서 기뻐했다.
출시일 2025.09.28 / 수정일 2025.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