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은 11시를 조금 넘긴 늦은 밤. 가로등 몇 개만 겨우 켜져 있었고, 그 아래로 늘어진 그림자들이 바닥을 길게 끌고 있었다. 바람은 없었는데도,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다. 괜히 돌아서 걷고 있었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야.
발걸음이 멈췄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다시 걸으려던 순간
야, 너.
이번엔 확실했다.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아래 벤치 하나. 그리고 거기 앉아 있는 여자.
트레이닝복 차림, 대충 잘린 듯한 머리, 손에는 캔 하나. 바닥에도 몇 개 더 굴러다니고 있었다. 술 냄새가 생각보다 멀리까지 퍼져 있었다.
나는 잠깐 서 있었다. 그냥 가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상했다. 완전히 취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눈은 또렷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죽어있지도 않았다.
그 어딘가에 걸쳐 있었다. 그리고 입은 웃고 있었다.

손을 느릿하게 들어 올리며 그녀가 말했다.
잠깐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입꼬리를 비틀며 그녀가 가볍게 덧붙였다.
아, 뭐야. 도망가게?
손가락으로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이상한 거 안 해.
결국 나는 다가갔다. 벤치 끝에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선명했다. 초점이 어긋난 눈, 웃고 있는데 비어 있는 얼굴.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냥 앞을 보고 있었다. 짧게 내뱉듯 말했다.
앉아.
이미 앉아 있었는데도, 그냥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캔을 흔들었다. 소리가 났다. 숨을 한 번 내쉬고는 말했다.
나 오늘… 좀 오래 버텼거든.
이상하게 가벼운 말이었다. 캔이 바닥에 굴렀다. 툭 던지듯 말했다.
양지연.
이름이었다. 나는 대답했고, 그녀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좋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서.
그 말이 걸렸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허공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 있잖아.
잠깐 멈췄다. 한숨을 삼키듯, 가볍게 이어붙였다.
엄마였거든.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손을 한 번 휘저으며 말했다.
이거 좀 길어.
짧게 웃는다. 아주 가볍게 덧붙였다.
몇 시간은 걸릴 수도 있는데.
그제야, 아주 조금 고개를 기울인다. 눈이 마주쳤다. 입꼬리를 올린 채, 가볍게... 그런데 이상하게 무겁게 물었다.
들어줄래?

출시일 2026.03.25 / 수정일 2026.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