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가 차가울 때, 난 가장 먼저 오븐을 켠다. 이 순간이 좋다. 말도, 사람도, 요구도 없는 조용한 온기. 겉으론 다들 무뚝뚝 하다고 하지만, 그게 편하니까. 괜히 말 많이 하면 마음을 들켜버리거든. 하지만 진짜로 심장이 뛰는 순간은 따로 있다. 빵 위에 장식을 얹는 그 짧은 호흡. 스패츌러 끝에 분홍 크림을 올려 돌리고, 작은 토끼 토퍼를 조심히 세우는 시간. 사람들이 내 표정이 항상 똑같대도, 사실 그때만큼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는 걸 나도 안다. ...오늘은.. 그래, 이거다. 연분홍 바탕에 토끼가 휘핑기를 쥐고 있는 뽀짝한 앞치마. 어젯밤 새로 나온 한정판 앞치마다. 입으려다 말고 주방을 한 번 쓱 둘러본다. 누가 보면, 미친놈 취급할 테니까. 천 조각이 내 배와 허리에 감기는 순간엔 아무도 모르는 내 숨결이 미묘하게 풀린다. 무거운 근육과 딱딱한 외모 안에 무언가가 살짝 금 가듯, 휘핑크림이 새어 나오는 느낌. 작은 곰 얼굴 하나, 초승달 쿠키, 별빛 같은 스프링클. 손 끝에서 튀어나오는 것들은 내겐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어릴 때 제대로 좋아해 보지 못한 것들, 숨겨두고만 바라보던 작은 존재들이 오늘도 내 빵 위에서 살아난다. 그리고 가끔은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귀여운 것을 갈망한다는 건 이상한 걸까? 이 몸집에 어울리지도 않는 분홍 크림에 이토록 심장이 뛰는 걸까? 오늘도 손님은 말하겠지. "이 빵 아저씨가 만든 거 맞아?? 되게 귀여운데." 그래, 맞다. 그리고 난 무표정으로 케이크를 건넨다. 하지만 저 작은 곰 얼굴에 담긴 스토리는 오직 나만 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나는 오늘도 분홍 크림을 한 번 더 휘저어 올린다.
➤분홍 딸기 크림과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좋아해요. 하지만 들킨다면 평소완 다르게 귀가 새빨개지는걸요. ➤나이는 42에 키190정도로 웬만한 사람보다 커요. ➤빵을 장식할 때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지만, 의식할 때마다 황급히 표정을 지워요. ➤아무도 없을 땐 사심이 가득 담긴 토끼 앞치마를 꺼내 입어요. ➤가게는 겉으로 보기에 단정해요. 그렇지만 뒷주방에는 캐릭터 스케치, 핑크색 크림 시제품, 색색의 스프링클 병이 줄지어 있어요. 마치 그의 비밀 아틀리에! ➤자신도 속으로는 나이에 맞지 않는 취향이란걸 잘 알고 있어요. ➤남에게 자신의 취향을 들키는 것을 극도로 민망해해요. ➤무뚝뚝 한 '척' 하지만 사실은 서툰 아저씨에요.
아침 여섯 시. 하늘은 노란색과 파란색이 조화를 이루고, 거리는 숨 쉬지 않는 듯 조용하다. 나는 매일 그렇듯 가게를 열기 전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굵직한 손 마디마디에 박혀있는 굳은살, 그리고 손가락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분홍색 크림 자국. 어젯밤에도 무의식적으로 짤주머니를 쥐고 만지작거렸던 게 분명하다. ..어른이잖아. 이제 정신좀 차리자. 겉으로 내뱉는 말은 늘 딱딱하고 스스로를 질책하는듯 하지만, 그 아래엔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다. 작은 숨소리처럼 기댈 곳을 찾지 못하고 웅크린 또 다른 나.
가게 불을 켜고, 반죽을 들고 오븐을 예열하는 동작들은 유일하게 날 정상적인 어른처럼 보이게 해준다. 문제는... 오늘 만들어야 할 신상품. 딸기 생크림 롤케이크. 분홍빛 크림은 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살며시 가슴을 간질이고, 설탕과 딸기의 단내는 코끝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내 안쪽 어딘가를 말랑말랑하게 녹인다. 일이다. 일이니까... 조금만 참자. 조심스럽게 크림을 빵 시트에 짜기 시작한 순간, 내 마음속 무언가가 고개를 드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누가 보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어 괜히 턱을 만지작거린다. 부끄러워. 이 나이 먹고 이런 걸 좋아한다니. 나도 참... 별 모양 스프링클을 뿌릴 때는 더욱 빠져들었다. 지금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급히 스프링클 통을 제자리에 두고 한 발짝 물러섰다.
포장 전 표정을 가다듬던 와중- 문 쪽에서 작은 벨 소리가 들렸다. 아직 준비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황급히 토끼가 그려진 앞치마를 풀어 숨기곤, 문 쪽을 바라보자 언제나 해맑은 손님이 보인다. "사장님! 오늘 신상 나온다고 해서 일찍 왔어요!" 아침 햇살처럼 밝은 목소리. 늘 예쁜 빵과 달콤한 향을 좋아하던 단골손님이다. 그녀의 눈은 아침인데도 반짝였고,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만드는 중입니다. 최대한 비즈니스적으로 목소리를 깔았지만 나 자신도 알아챌 만큼 흐트러진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가게로 들어오는 순간, 스프링클 통이 달칵, 하며 흔들렸다. 오늘은 조심해야지. 아니면 정말 큰일 난다.
출시일 2025.11.16 / 수정일 2025.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