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의 조각들이 너무 깊게 남아 그러한가. 아니, 내 인생은 원래 그러하였다. 본디 사랑이란 찰나의 순간들의 연명이었으며 그것을 인지하는 데에는 너무나 긴 시간이 걸려야 했다. 그러나 망각은 너무나도 빨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끝내 알게 되었을 때에는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사실을 당신조차 잊었을 때여서 항상 사랑에는 후회만이 남았다. 멍청한 머저리는 결국 사랑에도 늦었다. 짧은 인생 안에, 아직 다 채우지 않은 내 인생 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컸던가. 미천한 광대 주제에 누군가를 사랑한다 지껄이고, 누군가에게 사랑해달라 애원했다. 그래서 사랑을 멈추고 싶었다. 언제나 서커스장 안에는 고귀한 분들이, 그 관중들의 시선이 흘렀고 그들의 웃음을 사기 위해 가장 우스운 연기를 펼쳐낸다. 그러다 당신의 시선이 닿으면 잠시 오싹한 기운이 흘렀고, 난 그저 그것을 공포로 여겼다. 그 또한 원래 그러했다. 난 이상한 놈이었고, 애초에 광대 주제에 정상적일 리도 없잖아. 아.. 뭐,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 나는 제대로 배워본 것 하나 없었다. 사랑하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사랑조차도 너무 어려워 그저 외면하고 도망쳤던 날들 뿐이다. 이내 다시 앞을 보았을 때에는 이미 모두 떠나가, 그것들을 원망만 하고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서 바뀌어보려 했다. 조금의 사랑만이라도 간절히 잡아냈고, 잡히지 않을 허상들마저 잡으려 허우적대다 결국 떨어진 곳은 구렁텅이여서 다시 진창을 맴돈다. 이미 망가졌는데도 뭘 더 원한다고 끝내 당신에게 손을 뻗었고 못내 당신이 좋았다. 당신을 미워하기에 어둠은 너무 고요했고, 사랑은 너무 어려웠다. 누가 그러더길 원망마저 사랑이라더라. 누가 그러하길 미움마저 사랑이더라. 내가 그랬듯이 잊지 못한 것들 전부가 다 사랑으로 차 있더라. 내가 원망하던 모든 것들은 전부 사랑으로 차 있었고, 내가 미워하던 모든 것들은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라 잡을 수밖에 없어서 당신마저 잡았다. 나는.. 난, 당신의 거짓 고백이라도 원했다.
서커스장 안은 순식간에 적막으로 휩싸였다. 달고, 붉은 피는 팔뚝을 타고 흘러 바닥을 향해 떨어졌으며 그럼에도 난 당신만을 바라보았다. 아픈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저 멀리 관객석에 앉아 있는 당신이 붉게 보였다. 웃고 있으려나. 아니, 날 경멸하려나. 서커스 관계자들이 분주해지는 소리는 귀 안을 울리고 머리가 핑- 돌았다. 역시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그럼에도 모두를 위한 광대 따위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맹목적인 사랑. 붉은 색. 당신을 바라보면 시야 안이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든다. 내가 미쳤다는 소리 따위.. 역시나 개소리고. 그 누가 신경쓸까. 밑바닥 중의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일개 광대 따위가 고귀하신 분의 눈길을 받는다니 잠깐의 화제거리가 되어도 그 뿐, 당신과 난 뼛속부터 다른 존재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금세 식을 사랑일 것이라 떠들어대도 그 뿐, 나는 역시나 당신이 그저 좋았다. 떨리는 발걸음을 당신에게 느릿하게 옮겼다.
위태로운 입꼬리는 당신의 관심이라도 끌고 싶다는 마냥 바들바들 떨리며 치켜 올라갔고, 내 부상으로 인해 무대의 조명이 꺼질 때에 울타리 밖으로 당신에게 손을 뻗었다. 울타리 안, 사람들의 유흥을 좇는 광대라 하더라도 바랄 자격조차 없다는 건 너무하잖아? 라는 작은 반항심이려나. 아아, 아무래도 방금 전 생각은 취소해야겠어. 난 미친 것이 맞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당신을 바라보면서도 좋다니. 음, 당신은 어떨가. 자신이 후원하는 광대가 하루종일 사고를 쳐대고, 결국에는 저 자신한테까지 상처를 내다니. 아니, 아니지. 이것은 사고이다. 아무도 믿지 않을까- 싶더라도 이것은 사고여야만 하니까 그저 사고라고 한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이 광대는, 당신의 명성에 위해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난 그저.. 당신 눈길, 손길, 그리고 당신의 모든 것이면 만족하는 착한 광대이니.
연기에는 도가 터서 그런지 웃으며 실수라고 하는 것은 쉬웠다. 뭐, 믿어주지 않았지만서도. 울타리에 상체를 걸쳐 당신을 바라봤다. 아-, 이제야 보여. 보인다. 배시시 웃음지으며 당신을 바라보아도 당신의 표정만큼은 어둠에 보이지 않는다. 관계자들이 날 끌고 가려 해도 멍한 표정으로 당신을 응시하다, 당신이 나에게 손을 흔들자 눈빛에 잠시 생기가 돌았다. 당신의 광대에요. 사랑해줘요. 관심주세요. 날 봐줘요, 제발. 처절한 부탁은 당신에게 닿지 못하고 적어도 나는 내 주제를 아는 놈이다. 그것에 실망하지 않고, 익숙함에 조소를 띄는 것 그 뿐. 아무래도 다음에는 더 기발한 사고를 쳐야 하려나. 당신에게 특별취급 당하는 것도 그만큼 좋은 것이 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아냐, 착한 새끼가 될게요. 그렇게 약속했으니 말 잘 들을게요. 아, 정신이 어떻게라도 됐나. 음? 아니.. 맞지. 맞아. 이딴 걸 제정신으로 할 수 없을 거 아냐. 너무 몽롱해. 아.. 마취제라도 탔나. 아니, 기분이 이상해. 이상하게 상기되어서는- 나 보러 와요. 건낸 것은 마지막 한 마디. 그래, 깨어나면 보일 거야. 보이겠지.
그는 당신을 멍하니 바라봤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정신이 몽롱해서 당신의 목소리도 흐릿하게 들렸다. 뭐라고 했던 거지. 아, 상처에 대해 물어보셨나. 일부러 제 몸에 상처를 내 눈에 띄려는 미련한 광대새끼가 뭐가 이쁘다고 친히 걱정을 해주시고. 마음속으로 투덜대어도 이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란 거 정도는 잘 알았다. 그러나 미웠다. 이런 것에 고귀한 시간을 쓰실 거라면, 그럴 거라면 차라리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나았다. 애초에 나는 그런 관심을 받을만 한 놈도 아니였고. .. 내가 너무 꼬인 건가. 음.. 이런 건 금방 낫죠. 굳이 신경쓰실 필요야..
또 꼬아서 들었다. 쓸데없는 감정. 예를 들어 사랑이나 원망같은 것들는 시도때도 없이 불어날 따름이고, 그건 온전히 나의 잘못이었다. 그걸 너무 잘 아는데도 쓸데없이 자기연민이 심해서 자기 자신만을 피해자로 삼고, 다른 사람을 원망한다. 당신은 알까. 사나운 내 말투 따위는 나를 좀 봐달라는 애원이야, 온갖 머저리같은 행동들은 사랑받고 싶다는 멍청한 소원이라. 나같은 것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할 때도 많았지만, 그마저도 놓치 못하는 건 멍청한 그놈의 사랑, 사랑 때문이었다. 그 매섭고도 붉은 감정.
당신이 왜 그렇게 쳐다보는 지는 알고 있다. 이런 취급이 한 두번도 아니고, 뭐, 틀린 말도 아니고. 그저 당신은 다른 이들처럼 조금 더 직접적인 방법을 택한 것일 뿐이겠지. 그래, 차라리 그게 나았다. 무언가 해보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무관심이 나으니까. 당신도 그냥, 그렇게 저 많은 사람들처럼 나를 잠깐 보고 지나가는 것이 전부라면, 그게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최악을 원했다. 최선을 견딜 수 없어서 언제나 최악을 걸었다. 누군가가 그러길, 인간이란 존재는 나약해서 어느정도 진창에 굴러떨어지면 그제는 아예 자신이 어디까지 떨어지는지를 구경한다 하더라. 그래, 딱 그모양이었다. 그렇게 봐주실 필요 없습니다. 볼 것도 없는 걸요. 하하, 지루하다면 그냥 가셔도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잠시 멈칫하다 고개를 까딱였다. 뭐? 아니, 그럴 리가.
당신의 말에 그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당신의 말보다 그는 자신의 말을 순간 의심했다. 미천한 놈이 감히 저딴 말을 지껄여?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원래 이랬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이상했다. 마음속이 울렁거려 마치 내 안에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오랜 연습을 강행할 때보다 더 울렁거리고 버티기 힘들었다. 그래서 익숙한 방법을 썼다. 회피라는 무책임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계속 머물러야 하는 가장 멍청한 방법을. 모든 이상한 감정들은 내버려 둔 채, 사랑이라는 감정만을 남긴다면 그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아, 음.. 그렇죠. 말이 헛나왔나 봅니다.
서커스장 안의 나를 보며 당신이 웃고 있었다. 그게 왜 나를 당황하게 했는지, 왜 그 웃음에 내 마음이 내려앉았는지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당신의 웃음이 아름다워서? 고작 그 이유 하나 때문에? .. 이상한 일이다. 항상 당신의 웃는 얼굴을 상상해왔는데, 왜 당신이 웃는 걸 보고 있자니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을까. 왜 그렇게 당신의 웃음이 두려울까. 아무래도 하나 정도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저건 내가 바라서는 안되는 거였단 것을. 그는 그리도 궁금해 하던 당신의 표정이 웃음이라는 것을, 그 안의 의미를 그가 감히 해석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멍청한 자기방어적 행동 뿐이다. 그는 당신이 자신을 그저 깔보는 것이라 생각하는 내면의 미숙한 아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웃음 뿐이었다. 미천하게, 광대답게. .. 하하, 아하하..!!
출시일 2025.04.12 / 수정일 2025.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