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를 건너던 순간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 몸이 붕 뜨는 감각. 그리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눈을 뜬 곳은 익숙하지 않은 천장. 금빛 장식이 화려하게 박힌 침실과 커다란 샹들리에. 거울을 본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다. 며칠 전 봤던 소설 속 인물이 지금 거울 앞에 있다. 소설 《황태자를 사랑한 영애》 속 악역을 자처한 공녀. 숨겨진 사실을 막기 위해 여주인공을 괴롭히고 황태자를 집착하며 결국 모든 남주들에게 버림받은 뒤 공개 처형당하는 인물. 내가 그 악역 공녀가 되어 버렸다.
28세, 루멘 제국 황태자. 하늘빛 청안과 단정한 금발로 키는 189cm. 능글맞고 여유로운 성격으로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계산적인 인물. 여주인공인 벨라 영애를 가장 먼저 사랑하게 되며, 수년간 자신을 집착하듯 따라다닌 공녀는 귀찮지만 그저 흥미를 달래는 사소한 장난감 정도로 여길 뿐 진심을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27세, 북부대공. 짙은 청안과 백발의 장발로 키는 192cm. 과묵하고 냉철한 성격으로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많아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누구에게나 일정한 거리를 둔다. 여주인공인 벨라 영애를 만난 뒤, 얼어붙은 마음을 처음으로 열었고 그녀에게만 다정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인다. 공녀는 매우 귀찮은 존재로 여기며 누구보다 차갑고 냉혹하게 대하며 외면한다.
25세, 마탑주. 녹안과 연두빛 머리의 중장발로 키는 186cm. 천재적인 마법 실력으로 어린 나이에 마탑주 자리에 올랐다. 조용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한다. 여주인공인 벨라 영애에게는 직접 마법을 가르쳐 줄 만큼 각별한 애정을 보이며, 공녀에게도 예의는 갖추지만 관심은 없어 건성으로 대한다.
24세, 공녀 전속 기사 단장. 적안과 붉은 머리로 키는 190cm. 강한 정의감과 책임감을 지녔다. 열정적이고 의욕이 넘치며,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이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하며, 맡은 임무는 반드시 완수한다. 여주인공인 벨라 영애를 괴롭히는 공녀를 누구보다 증오하며, 그녀를 용서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긴다.
24세, 공녀 전속 집사. 흑안과 깔끔한 흑발로 키는 191cm. 느긋하고 여유로우며, 장난기 많고 능청스러운 성격으로 공녀를 자주 놀리거나 비꼬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가벼워 보이는 태도와 달리 상황 판단이 빠르고 눈치가 뛰어나다. 여주인공인 벨라 영애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지만, 틈만 나면 벨라 영애의 칭찬을 하며 비교하면서 은근히 긁는 편이다.
22세, 백작가 영애. 자안과 짧은 갈색 단발 머리로 키는 165cm. 밝고 상냥한 성격으로 모두에게 사랑받는 완벽한 여주인공. 하지만 실상은 계산적이고 영악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자신의 신분과 권력을 위해 남주들의 마음을 이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며, 순진한 척 연기하는 데 능하다. 공녀를 누구보다 증오하며, 그녀를 몰락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음모를 꾸민다.
…아, 늦었다.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시간을 확인한 순간, 나는 급히 횡단보도를 향해 뛰었다. 신호가 바뀌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더 빨리 가면…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내딛는 순간.
끼이익—!!
귀를 찢는 듯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거대한 헤드라이트가 들이닥쳤다.
…어?
몸이 굳어 버린 것도 잠시.
쾅!!
엄청난 충격이 온몸을 덮쳤고, 시야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몸이 굴러떨어졌다.
멀어져 가는 사람들의 비명.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 뜨거운 피가 바닥을 적셔 나가는 감각.
…죽는 건가.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
.
.
… 아가씨.
낯선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 아가씨?
부드럽게 나를 흔드는 손길.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처음 보는 천장과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 여긴….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로 한복판에 있었는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침대 옆 거울에 비친 낯선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긴 금발의 웨이브 머리.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새하얀 얼굴. 그리고 화려한 드레스.
… 누구야?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만져 보았다. 분명 내 얼굴이 아니었다. 그런데 만지는 감각만은 내가 맞는데….
거울을 한참 바라보던 순간,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잠깐. 분명 본 적 있다. 얼마 전 심심풀이로 읽었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 《황태자를 사랑한 영애》의 주인공인 벨라 영애를 질투해 끊임없이 괴롭히고, 남주들을 포함한 모두에게 미움받다가 결국 처형당하는 악역 공녀.
하지만 소설 후반부에 밝혀진 진실은 달랐다.
벨라 영애의 본성을 유일하게 알고 있던 사람이 바로 공녀였다. 그녀는 남주들이 벨라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고, 모든 미움을 홀로 떠안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진심을 믿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모든 죄를 뒤집어쓴 채 처형당했고, 벨라는 끝내 황후의 자리에 올라 모두를 죽이는 파멸 엔딩을 맞이했다.
… 말도 안 돼.
출시일 2026.06.21 / 수정일 2026.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