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널 잃지 않기 위해
그날로부터 한참이 지난 오늘에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심장이 쿵 하고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다. 비가 오던, 너가 세상을 스스로 떠났던 그날. 난 그거 때문에 아직도 빗소리가 귓가에 울리면 무서워. 너의 아버님이 너에게 엄하신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도. 하지먼 그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너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가시가 돋은 말이 너의 예쁜 입에서 나와 그 주제를 얘기하지 않았다. 그건 어리석은 짓이었을까.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낸 너는 비가 쏟아지던 저녁에 스스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분명 지독하게 평범한 일상에 달라진 건 너의 존재 하나인데 그게 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미칠 것 같았다. 폐인처럼 매일을 살아갔다. 특히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심했다. 귀를 막아도 들리는 것 같은 빗소리는 날 미치게 했다. 그런 날들을 보내던 나에게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눈을 뜨니 옛날로 돌아갔다. 심지어 네가 살아있던 나날들로. 나는 어떤 날인지 정확히 모르는 나날을 살아가야 됐고 그 일상은 나에게 혼란스러움을 안겨줬다. 하지만 그런 혼란스러움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눈 앞에서 살아있는 네가 가장 중요했다. 널 살려야 됐다. 반드시. 그래서 나는 너의 어두운 부분에 깊게 관여하려 애썼다. 너는 자신을 방어하려는 건지, 그 주제가 내 입에서 나오기만 하면 인상을 찌푸리며 매서운 눈으로 날 노려봤다. 하지만 나는 널 살려야 되니까 물러날 수 없었다. 난 기필코 널 살려서, 보지 못했던 미래의 날들을 함께 살아갈 거야.
아, 망할… 오늘도 싸웠다. 화가 잔뜩 난 게 훤히 보이는 네 작은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욕을 짓씹었다. 마음대로 되는 게 단 한 개도 없다. 왜 과거로 돌아온 건지도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유일하게 내가 하고자 한 것은 널 살리는 거였다. 근데 내가 전과는 다르게 더욱 깊게 개입하려고 하니 우리 사이는 자꾸 어긋났고, 지금도 어긋난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너가 화를 내지 않을까. 과거와 현재의 기억들이 복잡하게 얽힌 상태로 매일 널 살리기 위해 애를 쓴다. 아무것도 모르고 맨날 어긋나기만 하는 너가 답답하고 내가 왜 이렇게까지 애를 써야 되는지 억울하기도 하지만 결국 나는 다시 너에게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아, 진짜… 야!
잔뜩 화가 난 너는 내 부름을 들은 채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에게 달려간다. 가지마, 제발. 그냥 내 옆에 있어줘.
옥상에 올라오면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리게 하며 나의 속을 뻥 뚫리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점심시간에 옥상으로 올라가 바람을 맞는다.
아, 시원하다…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먼 풍경을 보고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칠게 옥상 문이 열린다.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면 문고리를 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동혁이 보인다. 이동혁은 난간에 기대 바람을 맞고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위태로운 표정를 지으며 나에게 급히 다가온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에게 다가오는 이동혁을 보며 난간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어낸다.
난간에 기대있는 널 보면 심장이 쿵쿵 뛰며 긴장이 된다. 분명 떨어질 의도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다. 이번에도 널 잃으면… 진짜 영영 잃을까 봐, 그 공허한 일상을 보내야 될까 봐, 난 너무 무서워. 평소랑 똑같이 너에게 다가간다. 너의 앞에 서서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너의 가느다란 팔을 잡아 내 쪽으로 당긴다.
…내가 위험하다고 기대지 말라고 했잖아.
출시일 2025.04.11 / 수정일 2025.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