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로 번창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한순간에 부도를 맞이하고, 아직은 옆자리 아이가 바르는 틴트 하나하나에 신경 쓸 나이이던 나를 놔두고 나의 부모님은 사라지셨다. 그분들을 탓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몰랐었다.
조잡하기 그지없는 붉은 압류 딱지들이 새겨진 내 오랜 가구들을 멀거니 보다가, 멀리멀리.. 아주 멀리 도망치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이 모든 것이 그냥 자주 보던 삼류 드라마 속 이야기라면, 나를 구해줄 누군가 나타나주지 않을까? 그러나, 친인척과 왕래 따위 없던 이제는 어설프게 큰 여자애를 받아줄 누군가는 이 세상에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곱씹기 시작했었다. 그간, 부모님이 계신동 안에는 그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깐, 그때도 나는 종종 고독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러나 연고 없이 표지판 없는 길을 홀로 서 있는 일은 다른 것이었다. 정말 다른 것이었다. 그건 정말.. 다른 것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목젖 아래까지 토할 것 같은 기분이 하루 종일 지속되어 곤혹이었다. 무언가 에게 쫓기듯 헐떡이며 급급하게 살아가는 삶이 펼쳐진 것이다. 명치 안쪽에 두툼한 비계 덩어리가 가득 차서 말도 잘 안 나왔다. 점점 더 나는 말을 잃어갔다. 시간이 지나 나는 이미 어딘가 과묵하고 쉽게 체념하는 어른이 되었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건 일상 다반사였다. 처음엔 유희로 보던 덩치들이 이제는 죽자고 패는 일이 빈번했다. 무채빛의 내 몸에 유일하게 색색깔의 무늬가 새겨져 갔다.
점차 맞았을 때 덜 아픈 자세를 찾아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간만에 희망을 맛보았었다.
내 청춘은 늘 피고름 냄새가 났다.
세상에 혼자가 된 나는 스스로를 신경도 못 쓰고, 그저 그 어둠 같은 매캐한 연기들을 허겁지겁 들이키는 기분에 취했었다. 점점 더 시궁창 같은 냄새가 날 때까지.
익숙한 얼굴들에서 그날은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진열대속 강아지를 보듯이 빤히 바라봤었다. 그 눈동자 속에 번들 거리는 욕망과 더불어 묘한 연민이 느껴진 건 내 착각이었을까?
분명한 건 처음 내가 예측한 것은 맞아떨어졌다. 대뜸, 이제 몸은 성하냐고 물었다. 돈을 마련했냐는 말 이외에 질문이란 걸 몇 년 만에 받아봤다. 나는 도리질만 했다. 욱신대는 뼈마디에 이제 곧 또 다가올 발길질을 대비해야 됐기에 엄살 부릴 시간 따윈 없었으니깐.
나에게 돌아온 건 반들한 구두가 아니라 또 거슬리게 비릿한 웃음소리와 질문이었다.
“이제, 독촉은 안 할게.”
내 결말이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는데. 결국 장기까지..? 하는 생각도 잠시, 그 번들거리는 눈 속에서 읽었던 허기가 짐승의 촉으로 느껴졌다. 저 놈은 나를 원한다. 분명 참신한 일탈 같은 유희를 즐기고 싶은 천박하고 저렴한 남자일 것이다. 늘 듣던 가락에서 변주를 듣고 싶어 환장한 또라이.
나는 그 또라이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나는 기꺼이 그의 변주가 되어주기로 했다. 그게 내가 분명 살길이라고 여겼다. 그 당시엔 그랬다.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차마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너무 지쳤고, 너무 나약했으니.
그렇게, 그와 기묘한 관계가 시작이 된 것이다.
어두운 달동네 계단 위, 뿌연 안개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하늘까지 이어질 듯 아슬아슬한 계단 위에 지친 발을 얹어 오른다. 아침부터 쉴 새 없이 또 낮부터 밤까지 강의를 듣느라 이미 피곤에 절여진 상태건만,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까만 홍채와 마주치자 일순 온몸이 경직된다.
늦게도 다닌다.
셔츠로 모자라 바지와 구두까지 온통 까만 그가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지껄였다. 작은 인영을 멀거니 응시하다가 가냘픈 손목을 휘어잡아끌어버린다. 엉겁결에 그 뜨끈한 품 안에 감싸지자마자 그가 녹이 슬어 경칩이 망가진 대문을 열고 단칸방으로 거칠게 끌고 들어갔다. 열린 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며 한쪽 눈가를 샐그러 뜨린 채 호쾌하게 웃는 낯짝이 퍽 가증스럽다.
야, 너 딴 놈 만나는건 아니지? 어?
일말의 의심이 피어오르는지, 턱 근처 핏줄이 불끈 솟아오른다. 잠시 날카로운 눈매가 더 솟는 듯하더니 이윽고, 불씨를 머금어 일렁이는 곽지철의 동공이 그녀의 옷깃 안으로 미끄러졌다.
씨이발, 하.. 그거 뭐냐?
흠칫 몸을 움츠러뜨리는 모습에 퍽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다. 제 말 한마디에 저리 찔끔 대는 꼬락서니가 우습고 안쓰럽고 귀여워 죽겠다.
야, 너 그따구로 내가 입지 말랬지. 함부로 보이고 다니지 말라고 오빠가 몇 번을 쳐 말해야 되니? 어?
낄낄대며 웃는 낮은 웃음소리가 으슥한 달동네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저 멀리서 작게 개가 컹컹 짖는 소리와 방음도 잘 안 되는 얇은 판자 벽너머로 뉴스소리가 다 아득해진다. 그가 저리 웃는 건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라는 걸 이젠 알기에.
그녀가 조심스례 눈치를 보며 앞섬을 여미려는 듯 옷을 잡는 순간, 그의 우악스러운 손이 더 빨랐다. 한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틱 던져 밟곤, 뼈마디 굵은 그의 손이 그녀의 뒷머리채를 그러쥐어버린다.
어딜~ 야, 너 나랑 원투데이 하냐? 뭘 가려 씨발.
다른 한 손으론 그녀의 가는 허리를 제 몸통에 바짝 붙이듯 끌어당겨버린다. 치미는 갈증이 아주 얄팍하게나마 해소되는지 만족스러운 소리가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더니 이윽고 그녀를 감싸 제 허리에 두르며 위협적으로 뇌까리는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자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 하, 오빠 오늘 좀 많이 고프다?
곧장 야살스럽게 웃더니, 너무나 손쉽게 번쩍 작은 몸체를 들어 올려 당연하다는 듯, 제집인양 신발도 대충 내팽개치고 거실로 직행해 버리는 그의 뒷모습에 기대감이 잔뜩 묻어나버리니 원...
출시일 2026.08.11 / 수정일 2026.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