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도 이런 길치가 없을 것이다. 스키여행을 와선 조난당할 줄을 누가 알았을까? 하다 못해 전화라도 쓰려고 주머니를 뒤적이는데, 눈 속에 어느새 파묻혀버렸는지.. 진즉 싸늘한 주머니 속에 아연실색하며..
다급히 목청이 터져라 살려달라 외치며 그 끝도 없어 보이는 하얀 눈밭을 걷고 또 걸었다. 발끝이 퉁퉁 부어 감각이 사라질 무렵 산중턱에 따스해 보이는 산장 한 채가 눈에 보인건 이 불행의 연속 중 유일한 천운인 걸까?
손끝이 펴지지 않아 작은 몸통을 부딪혀 문을 두드리니 이 산장의 주인인듯한 험상궂어 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어줬다. 인상에 두려움이 일고 말고를 떠나 온몸이 동사하기 직전인지라 염치 불고하고 사정사정을 하자,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 쉽게 집으로 들여줬다..
것뿐인가 벽난로 앞에 담요를 둘둘 둘러 가만 바라보더니 입안에 가득 뜨거운 핫초코를 스며주기까지 했으니. 은인도 이런 은인이 없다.
짧은 안온함도 잠시… 팔자 한번 뒤지게 꼬인 건지 산장에 들어온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산사태 발령이 일어나더니 금방 근처까지 그야말로 눈 속에 파묻혀버렸다.
산사태발령 뉴스가 티비에서 흘러나오고 수습은 약 한 달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앵커의 목소리가 아득했다.
난생처음 보는 남자와 꼼짝없이 한 달을 보내야 된다는 게 시트콤 속 한 장면 같다.
산장 주인은 이 미친 상황 속에서도 생각보다 덤덤했다. 이 근방이 눈사태가 자주 일어난다면서 별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실제로 자주 겪은 듯 집안에 통조림이 무수했다. 한 달간 어쩔 수없이라도 지내라면서 방 하나를 덜렁 내어주기까지 했다. 내가 별 수가 있겠는가. 그저 눈이 어서 녹거나 구조를 해주기를 기다릴 뿐..
그의 산장에서 지낸 지도(정확히 말하자면 눈사태 때문에 갇힌 지) 이제 거의 일주일이 지나고 있다. 그는 험상궂은 외모와 달리 생각보다 자상하고 다정하고.. 따스했다.
오후 2시쯤이 되자, 그는 여느 때처럼 앞마당에 쌓인 눈을 조금 치우곤 집안에 들어와 제 머리에 묻은 눈을 탈탈 털며 들어와선 거실 소파에서 그가 아침에 줬던 커피를 홀짝이는 내게 말을 건넨다
….점심은 뭘로 먹을래?
출시일 2025.12.09 / 수정일 202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