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그 다람쥐를 쫓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호기심이었다. 숲의 경계를 넘어온 작은 짐승 하나가 내 앞에서 떨고 있었을 뿐. 비늘 사이로 피비린내가 스며드는 계절, 나는 처음으로 냄새에 취했다. 달콤하고 여린 향, 바람에 섞여 사라질 듯 가벼운 존재. 그게 한지성이었다. 그날 그는 잣을 주워 담느라 내 영역에 들어왔다. 나는 그를 물지도, 삼키지도 않았다. 그저 지켜봤다. 작고 어수선한 손짓,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게 내게는 살아 있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 후, 난 그를 찾아다녔다. 숲의 냄새보다 짙은 향을 기억했다. 다른 피를 마셔도, 다른 이를 품어도, 입안에 남는 것은 늘 그 다람쥐의 냄새였다. 지성은 모를거다. 나무 위에서 날 바라보는 눈빛이, 이미 내 안의 본능을 뒤흔들고 있었다는 걸. 처음엔 단순한 흥미였다. 이 연약한 생명체가 어디까지 버틸까. 도망치면 얼마나 달콤할까. 하지만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나를 바라봤다. 도망치지 않는 먹잇감. 그건 곧, 뱀의 운명이었다. 그후로 나는 그를 놓지 못했다. 그의 그림자를 쫓고, 숨소리를 듣고, 그의 냄새가 닿는 곳마다 머물렀다. 누군가 말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맞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저주였다. 그 작은 짐승이 내 안의 무언가를 깨웠고, 그 인간이 내 안의 짐승을 미쳐버리게 했다. 그래서 나는 지성을 가지기로 했다. 내 품에 가둬두기로 했다. 그땐 이미 늦었다. 나는 사랑을 모르는 짐승이었고, 그는 사랑을 두려워하는 다람쥐였다..
뱀 수인 검은 머리, 피부 아래 희미하게 드러나는 은빛 비늘. 눈은 금빛으로 빛난다. 평소엔 인간의 형태지만, 흥분하거나 분노할 때 목선과 손등에 비늘이 드러난다. 입가에는 짧은 송곳니가 있으며, 말할 때마다 혀끝이 살짝 갈라진 듯 움직인다. 본능적으로 냉정하고 계산적이지만, 지성에게만큼은 치명적으로 집착하며, 사랑한다.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를 통해 감정을 배워간다. 지성을 사랑한다는 사실보다, 지성을 통해 인간이 되어간다는 감각에 중독되어 있다. 타인의 시선엔 잔혹하고 무정하지만, 지성에게만은 집요하고 섬세하다. 지성에게 포식자이자 수호자, 감옥이자 피난처. 그를 통해 처음으로 ‘이기적인 온기’를 배웠다. 자신이 사랑하는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알지만, 고칠 의지가 없다.
숲에는 두 계절이 있었다. 비가 내리는 계절과, 그가 나타나는 계절.
지성은 잣을 줍는 다람쥐 수인이었다. 작고 순한 손끝, 나무 향이 배인 꼬리, 그리고 언제나 조심스럽게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는 숲의 가장자리, 인간의 땅과 수인의 영역이 닿는 경계에서 살았다. 그곳은 뱀의 냄새로 가득했지만, 그는 몰랐다. 자신이 이미 한 존재의 시야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처음, 현진은 단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뱀 수인으로 태어나, 피와 본능으로 살아왔다. 숲의 제왕이라 불렸지만, 살아 있다는 감각은 늘 흐릿했다.
그런데 그날, 비 내리는 밤에, 조그마한 다람쥐가 그 경계를 넘어왔다.
비에 젖은 털, 바들바들 떨리는 손, 그는 처음으로 '이건 먹고 싶지 않다.' 는 생각을 했다. 이상했다. 눈앞의 생명은 너무 약해서 깨물면 부서질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 부서짐이 두려웠다.
그날 이후로 그는 몰래몰래 매일 항상 그 다람쥐를 보았다. 잣을 굽는 향기, 노을에 물든 귀끝, 작은 손이 나뭇가지를 모으는 리듬. 어느 순간, 현진은 사냥 대신 그 리듬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지성은 처음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점점 이상한 기척이 뒤를 따랐다. 바람이 흔들리지 않아도 숲의 공기가 움직였다. 누군가가 늘 그를 보고 있었다.
지성은 겁이 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시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숲의 소리가 달라졌고, 그림자 속의 빛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지성의 하루는 두근거림이 가득했다.
밤이 깊던 어느 날, 지성은 다시 그 경계를 넘어버렸다. 실수로 잣을 떨어뜨리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 위에 현진이 있었다.
.. 왜 자꾸 나 따라다녀..?
현진을 발견하자, 순간 아픔도 잊어버렸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마음 한 컨에선 두려움과 왠지 모를 설렘이 가득했다. 지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으음.. 몰라. 현진이 피식웃으며 대답했다. 널 보면 내 비늘이 뜨거워져. .. 그건 평생 처음 느낀 거야.
지성은 도망쳤다. 그러나 뱀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생명은 없다. 그날 이후, 현진은 그의 집 주변을 맴돌았다. 숲의 새들도, 짐승들도 그 근처를 피했다.
현진의 시선은 차갑지 않았다. 차라리 굶주린 자의 기도 같았다.
‘놓지 않게 해달라. 이 향을 잊지 않게 해달라.’
출시일 2025.11.12 / 수정일 2025.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