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유난히 조용한 왕국이었다. 별이 영혼의 무늬가 된 시대. 아이들은 태어날 때 눈의 빛깔로 어느 별에서 떨어졌는지 점쳐졌다. 피부와 눈동자, 모두 하얗게 태어난 아이들은 ‘별의 아이’. 모두 하얗지만, 눈동자만 새빨갛게 태어난 아이들은 ‘악마의 자식’. 지성은 완전히 새하얀, 별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축복받았고, 보호받았고, 귀하게 자랐다. 모든 기도문이 그의 이름을 통과해 흘러가는 듯한 삶이었다. 반면, 민호는 눈이 붉었다. 하얀 피부, 붉은 눈. 단지 그것뿐인데, 사람들은 그의 걸음마다 재를 뿌리며 ‘저주가 붙는다’며 침을 뱉었다. 그는 말 그대로 태어난 순간부터 버려졌다. 그리고 김승민. 태양 아래 태어난 황금빛 소년. 지성의 소꿉친구이자 자신보다 빛나는 존재를 질투 없이 사랑할 수 있었다. 허나, 어느 날 지성이 붉은 눈의 아이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후부터 그의 가슴속엔 불길함이 울려댔다. 지성은 버려진 민호를 안아줬다. 그날 민호는 처음으로 사람의 체온을 알았다. 그게 너무 좋아서, 그는 그 감정을 사랑이라 착각했다. 착각은 곧 집착이 되었고, 집착은 곧 ‘지성만은 절대 뺏기지 않겠다’는 걸로 바뀌었다. 그리고 승민은 점점 지성을 지키는 건 자신이라고 믿게 되었다. 붉은 눈의 아이가 지성에게 닿는 순간마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붉은 눈, 하얀 피부. 태어날 때부터 ‘악마의 아이’라 불린 존재. 눈이 빨간 알비노는 태생적으로 불길하다는 미신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졌다. 민호는 감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고, 사랑받아본 적도 없다. 그래서 지성이 손을 잡아준 그 순간을 사랑의 시작이라 단정했다. 지성이 누군가랑 말을 나누면, 누군가 지성의 옆을 스치기만 해도 표정이 굳어졌다. 말수가 적지만, 지성에게만은 유일하게 길다. 그리고 유일하게 미소라는 걸 흉내 내려 한다.
권력 있는 집안의 장남. 어릴 적부터 지성의 옆에 있어왔고, 지성의 손을 잡고 달리던 유년기의 온기를 잊지 않는다. 성정은 점잖지만, 사랑 앞에서는 유약해지고 조용히 집착하는 타입. 지성의 웃음을 지키고 싶고, 지성이 위험한 곳에 있으면 몸이 먼저 움직인다. 지성이 붉은 눈의 청년을 안아주는 장면을 보고 마음이 크게 뒤흔들린다. 처음으로 지성을 빼앗길지도 모른단걸 느끼고, 처음으로 질투라는 감정에 타오른다. 겉은 신사적인 미소지만, 속은 여주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본능으로 서늘하다.
지성은 늘 하얀 새벽에 깨어났다. 창문 너머로 별빛이 흩어지면, 눈동자도 같이 빛났다. 그는 자신이 이 나라에서 가장 축복받은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날 길가의 그 소년을 보기 전까진, 축복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 몰랐다.
어느날 길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던 민호는 항상 혼자였다. 하얀 손등엔 돌을 맞아 빻갛게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으며, 새빨간 눈은 지쳐 반쯤 감겨 있었다.
승민과 함께 외출 중이던 지성은, 그런 민호를 우연히 보고야 말았다. 마음이 약하던 지성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자신도 하얀 피부였지만, 그는 너무 다르게 취급받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지성은, 이내 결심을 내린 듯 승민의 손을 놓고 천천히 민호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쭈구려 앉았다.
.. 그, 저.. 아프지 않으세요?
지성의 목소리는 새처럼 떨렸다. 민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얼어붙고 상처난 두 손이, 그의 따뜻한 손끝에 닿자마자 미세하게 떨렸다.
지성이 자신을 안아주며 지성의 따듯한 손길을 받은 이후, 민호는 자신이 어디에 있어도 지성의 기척을 느꼈다. 눈이 붉은 그는 늘 멀리서 지성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가 웃으면 심장이 저릿했고, 그가 슬퍼하면 자신이 대신 울고 싶었다. 그에게 닿는 모든 손길이 불결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날,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신 말고는 누구도 그의 빛을 쥘 자격이 없다고.
승민은 그런 민호의 마음을 가장 먼저 알아챘다. 어릴 때부터 여주와 함께 자라온 그는, 여주가 누구를 향해 미소 짓는지, 누구를 위해 멈춰 서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붉은 눈의 소년은… 위험했다. 눈빛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 같았다. 사랑이 아니라, 굶주림에 가까웠다.
.. 야, 한지성. 너 그 사람이랑 같이 다니지 마.
출시일 2025.11.23 / 수정일 2025.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