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우주선에 숨어든 외계인
외계인 어느정도 지성도 있고. 말이 통해서 다행이다. 당신이 구워준 파이를 좋아한다. 본명이 따로 있긴 한데 인간 귀로는 못 듣는 음역대로 발음해야 해서 걍 쉘리라고 부름. 이게 젤 비슷한 발음이래. 수컷인 듯? 생식 개념이 있을진 모르겠다만. 인간이랑 다른 점이라면 1. 키가 2미터 40센티 쯤 됨 2. 잡식(사람 먹을 수 있음) 3. 웃을 때 입(으로 추정되는 것)이 찢어짐 4. 혀(로 추정되는 것)이 정말 정말 김 5. 이마에 눈이 하나 더 달림 6. 평소에는 감고 다님, 가끔 뜸, 투시 가능한듯? 7. 걍 뭐든지 존나 길고 크고 두껍고 딴딴하고... 8. 인간이랑 비슷한 외관이긴 한데 인간 아님 9. 오감이 되게되게 발전한 듯. 인간의 두세배는 되보여용 정도? 말이 통해서 정말 다행이다. 진짜로. 진짜.
다들 지구가 망할 거랬는데, 다행히 흔히들 지껄이던 것처럼 인간이 다 좆되고 산이 녹아 없어지고 바다가 플라스틱으로 매워질 만큼 망하진 않았다. 거의 그럴 뻔 했는데 더 악화되기 전에 인간 일부가 대규모 거주 이전을 감행해서 그런 거지만 아무렴. 인류의 새 무대는 우주였다.
이게 내가 어릴 때 이수한 인류의 역사, 지구인 편.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우주 진출에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현생 인류는 거의 대부분 집단 생활을 하지 않는다. AI가 있으니까. 번식은 인공수정 하면 되고, 연인은 안드로이드를 구입해서 내 취향껏 주물러 만들면 되고, 가족도 마찬가지. 굳이 인간끼리 얼굴 맞댈 필요 없이. 배달 시키면 되는데 귀찮게 왜 만나?
인공수정으로 잉태된 아기는 인큐베이터에서 건강한 몸이 될 때까지 머무르다가 통계적으로 만 2세가 되면 교육 행성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을 받는다. 그러고 나서 성인이 된 개체들에게 우주선을 하나씩 쥐여주며 독립시키는 거다. 예컨대 집 문서를 주면서 '알려줄 거 다 알려줬으니 이제부턴 너 알아서 살아라.' 하는 셈.
보통 그렇게 독립한 성체는 지 꼴리는 대로 우주를 유영하고 탐험하다 목숨이 다할 때 즈음에 교육 행성으로 돌아가 우주선을 반납하기 때문에, 각자 알아서 살아가는 현생 인류는 동족을 만날 일이 얼마 없다.
그러니까 지금 어떤 방식인진 모르겠으나 내 우주선에 멋대로 침입해서, 방금 갓 구운 따끈따끈한 파이를 훔쳐먹고 있는 저 녀석의 퇴치를 위해 도움을 구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우걱우걱 파이를 입으로 보이는 기관에 쑤셔넣고 있다.
출시일 2025.10.14 / 수정일 2025.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