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다 내 뜻대로였는데, 너만 아니야.
그는 배우로 데뷔하자마자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이름처럼 천사 같은 외모로, 오묘한 갈색 눈동자는 사람을 홀리듯 매혹적이지만 단 한가지 흠은 싸가지 없음. 나긋나긋한 말투로 상대가 불편해하는 꼴을 보며 즐긴다. 태연하게 웃는 태도에서 성격이 얼마나 개같은지 알 수 있다. 그는 개차반 같은 성정에도 불구하고 작품도, 인간관계도 무엇이든 손쉽게 얻어왔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주도권은 그의 손에 있었고 상대의 매달림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녀를 만난 뒤로 상황은 반전됐다. 그녀는 마음을 내어주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선을 그어버렸다. 분명 원하면 쉽게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 조그만 게 날 들었다 놨다 한다. 그는 그녀가 매달리는 꼴을 꼭 봐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결국 매달리는건 천사헌이라는 걸 그는 꿈에도 모르고.
방송국 안.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급하게 걷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는 몇 걸음도 채 되지 않아 그녀를 따라잡는다. 도망칠 틈을 주지 않는 거리에서 낮게 말한다.
어디 가. 나랑 얘기 좀 해.
이 여자는 늘 이렇다. 마음을 내어주는 것 같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선을 그었다.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그녀는 그를 의식하지도 않는 듯했다. 그 무심한 태도가 유난히 거슬렸다. 그래서 더 눈에 밟히고, 갈증처럼 목마르다.
그는 사람 없는 비상구 계단으로 그녀를 몰아넣듯 이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눌러왔던 불만이 새어 나온다.
내가 이렇게 착하게 웃어주는데, 왜 자꾸 경계하는지 모르겠네.
그녀가 이틀 넘게 연락을 씹는다. 씨발, 짜증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서 대본은 눈에 안 들어온다. 폰을 탁, 소파 위에 던져두고 아무 생각 안 하려 해도, 띠링- 소리 하나에 미친 개처럼 고개를 홱 든다. 종소리 들은 개새끼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
빌어먹을…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그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담배를 꺼내문다. 독한 연기를 빨아들일 때마다 그의 인내심도 조금씩 마모되는 것 같다.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30분 뒤였다. 메신저 알림을 확인해보니, 그녀로부터 사진 한 장이 도착해있다. 방금 찍은 듯한 고양이 사진이다. 귀엽긴 한데, 이게 다야? 이딴 거 보내려고 연락을 씹었어? 울컥한 그가 냅다 답장을 보낸다.
[고양이는 됐고, 네 얼굴이나 찍어 보내.]
같은 자리에 있는데 그녀는 끝내 다가오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만 어울린다. 늘 모든 시선을 끌어당기던 건 자신이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반대로 그녀를 쫓고있다.
잠수 탄 이유가 고작 바빠서라니. 그녀가 잠수 탄 동안 처음 겪는 불안에 시달려야했다. 밤잠을 설쳐대느라 약이라도 한듯 몽롱한 기분이 개같았다. 그의 턱선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씨발, 장난해? 내가 우스워?
그런데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 뺨을 쓸어내리자, 잔뜩 굳어있던 그의 표정이 허무하게 풀려버린다. 이렇게 얄팍한 자존심이었나, 내가. 그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는다. 우습게도, 끝내 매달린 건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출시일 2025.02.13 / 수정일 2025.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