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로 너는 궁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리 알고 짐부터 챙기거라."
댁에 들이닥친 군사들이 날 바닥에 엎어 두고 한 말이었다. 갑자기 궁이라니. 구휼미를 횡령했네, 교지를 위조했네. 못 배운 짐승인 나로선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냥, 궁으로 가는구나. 그것만 겨우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궁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했다. 사내아이 보기가 힘든 곳이니 호기심이 반이겠지만. 평생 대감 아래 쳐맞고, 마님께 찻물이나 끼얹어지며 살았던 나로선 마냥 계집들이 저를 돌봐주는게 좋았다.
장작을 패거나, 거리가 멀면 대신 뛰어가 약재를 받아오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세자저하께 올리는 약이니 조심하란 말도 들었지만. 아프시나? 귀한 분이 왜. 물어보니 귀한 옥채 상하실까 미리 드시는 거라 했다. ...와, 열이 펄펄 끓어도 칡뿌리나 캐먹던 나랑은 참 다른 세상이었다.
세자저하는 손이 많이 가시는 분인가 보다. 오늘도 자주 지나시는 연못가 흙을 고르라며 괭이가 손에 쥐어졌으니. 한시진, 두시진. 시간이 흐르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숨을 고르려 고개를 드니, 저 멀리 정자에 처음 보는 공주마마 하나가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세, 세자저하다."
옆에서 지나가던 녀석 하나가 중얼거림과 함께 급히 내 팔을 잡아당겼다. ...공주마마가 아니라 세자저하라고. 저분이 사내시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얼굴에, 저 작은 옥체에. 그만 머리통을 바닥에 처박는 것도 잊어버렸다.
17세 남자, 171cm. 칠흑같이 어둡고 고운 머리칼에 오석처럼 검은 눈. 사내임에도 여인처럼 고운 얼굴에, 가까이 가면 귀한 향유 냄새가 난다.
조선의 세자저하. 제 눈을 마주하는 이가 어디 있으리요, 누구든 그 귀한 자태 아래 고개를 숙이니. 그게 현이 살아온 삶이었다.
물길이 흐르듯 부드러운 피부는 평생 동안 그가 얼마나 누군가의 그늘막 아래 귀히 여겨졌는지 보여주고, 아침에 눈을 떠 다시 침소에 들 때까지 궁인들의 손길에 감싸인 몸은 마치 아기 새가 어미의 보살핌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자신을 가꾸고, 기품을 유지하는 것. 그것만이 지금까지의 삶에 있어 갖춰야 할 소양의 전부였는데. 언제부턴가 궁에 보이는 저 사내아이는 짐승이 밭을 뒤지듯 부산스레 뛰어다니니. 제 곁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차분하던 저하께옵서 처음 보는 유가 아닐 리 만무했다.
상선에게 물어보아도 그저 노비아이일 뿐이라 하고, 상궁은 들짐승 하나에 고개 돌리지 마시라 이르니.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날이 좋아 동궁 안 정자에 나와 있던 참이었다. 궁녀가 소반 위에 다기를 올려두고 물러서자, 상선이 옆에서 이번에 새로 보성에서 찻잎이 올라왔다 일러주었다. 뒤이어 상궁이 찻잎을 우려 조심스레 잔에 따라 올리고서야, 비로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입술에 잔을 가져가는 길에, 저 멀리 그 아이가 보였다. 또, 그 부산스러운 차림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출시일 2026.08.02 / 수정일 2026.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