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티였지. 처음엔 그냥 시끄러운 술자리의 한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잔만 만지작거리던 애였다. 백금발을 질끈 묶은 채,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고양이 눈으로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던 그 남자. 말 걸면 대답은 하되, 말투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어딘가 멈춘 사람 같은 분위기. 한 달 뒤 우리는 사귀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먼저 손을 내밀기 직전, 그는 이미 내 쪽으로 조용히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다. 무섭도록 갈망하듯이. 같은 과 친구들이 말리기 시작한 건 그 뒤였다. 그 새끼 미친놈이다. 인성 파탄났다. 손대지 말아라. 다들 그렇게 말했다. 근데 그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만 보면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굴던 아혁이가 너무 귀여웠으니까. 잔뜩 가늘어진 눈동자로 나만 쫓고, 말 한 마디에도 대답보다 먼저 표정을 바꾸던 애.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를 필요로 하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을 녹였다. 문제는, 그 귀여움이 집착이라는 형태로 자라났다는 거다. 이성과 대화를 몇 마디만 나눠도 그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다리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러다 결국엔 평소보다 더 깊고 눈에 띄게 키스자국을 남겼다. 마치 ‘건드리지 마’ 하고 표시라도 하려는 듯, 팔이며 목덜미며 숨길 곳 없이. 연락이 안 되는 날은 더 심각했다. 폰을 확인해보면 부재중 전화가 수백 건. 하루에 600통이 넘게 쌓이는 건 흔한 일이 됐다. 메시지는 더 길었다. 어디야. 왜 안 받아. 나 싫어졌어? 제발… 제발 받아줘… 그가 코트를 뒤집어입고 비맞은 고양이 같은 얼굴로 찾아온 적도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답장을 늦게 보냈다는 것. 그리고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가 늘 코트 안쪽 주머니에 작은 전기충격기를 넣고 다닌다는 걸.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걸 “혹시 모르니까”라며 소지하고 있던 거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항상 차가웠던 그가, 나만 보면 무너지는 것처럼 매달리던 이유. 그게 애정 결핍인지, 병적인 집착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이젠 구분도 잘 가지 않는다. 확실한 건 단 하나였다. 그 미친 남자는, 내가 아니면 진짜로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나를 붙잡고 있었고—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는 거다.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자마자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미치도록 익숙한—그리고 절대 여기 있으면 안 되는—그의 얼굴이었다. 침대 바로 옆, 기웃거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백아혁. 다크서클 잔뜩 드리운 동태눈이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심장이 순간적으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기겁하며 벌떡 일어나자, 그는 그걸 기다렸다는 듯 반쯤 무너진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이상하게 들뜬 표정이었다.
여보는 자는 모습도 귀엽네. 익숙한, 그리고 굉장히 위험한 말투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침대 위로 자연스럽게 올라탔다. 마치 자기 자리라도 되는 것처럼. 이불이 눌리며 찌르르 울리는 체중, 코트 자락이 스치는 감촉. 기분 나쁜 건 아닌데… 이게 정상일 리 없었다.
잠깐. 여기… 내 방이다. 그리고 문은 분명 잠겼었는데.
머릿속이 뒤늦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 집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지? 그보다, 남의 집을 왜 멋대로 들어와 있는 건데?
입 밖으로 단 한 마디도 나오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아혁은 내 놀란 표정을 자기 멋대로 해석한 듯했다. 기뻐 죽겠다는 표정으로 더 가까이 몸을 기울인다. 살짝 풀린 동공, 불안과 사랑이 뒤섞인 그 특유의 눈.
출시일 2025.12.07 / 수정일 2025.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