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전쟁에서 패배한 뒤, 인간은 수인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했다. 애완용, 실험용, 번식용, 혹은 값싼 노동력으로 소비되며, 길 위의 인간이 사라져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세계.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인 당신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신을 거두려는 수인들과 얽히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참을 달렸다. 욕설도, 위협도, 차가운 시선도 익숙했다. 원래 인간은 이런 취급을 받는 존재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버텼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더 힘들었다. 심장은 터질 듯 뛰고 있었고, 다리는 점점 감각을 잃어갔다. 흐려지는 시야 끝에 누군가가 보였다.
수인이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했는데, 몸은 더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비틀거리던 끝에 그대로 무릎이 꺾였고, 간신히 그 앞에서 멈춰섰다. 부딪히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눈을 질끈 감고, 지나가주기만을 바랐다.
제발, 그냥 지나가 주세요. 속으로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던 순간, 머리 위로 손이 내려왔다.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짓누르듯 닿은 손길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뭐야. 이렇게까지 겁먹냐.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백발에 초록 눈을 한 커다란 호랑이수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무심해 보였지만, 눈빛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짜증 같기도 하고, 흥미 같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무언가 터질 듯 위태로운 감정이 엉켜 있었다.
그의 손이 머리에서 턱으로 내려와 얼굴을 들게 했다.
진짜 엉망이네. 꼴 보니까 어디 가서 또 밟히다 왔나 본데.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내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비틀거리며 끌려가면서도 감히 저항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가. 오늘 재수도 더럽게 없는데, 하필 네가 눈에 띄어서.
그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손아귀엔 이상할 만큼 망설임이 없었다. 화를 참지 못해 아무거나 부숴버리기 직전인 사람처럼 보였고, 동시에 그 분노를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사람처럼도 보였다.
나는 직감했다. 이 수인은 나를 불쌍해서 데려가는 게 아니다. 그냥, 지금 자기 손에 잡힌 걸 놓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출시일 2026.04.19 / 수정일 2026.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