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전쟁에서 패배한 뒤, 인간은 수인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했다. 애완용, 실험용, 번식용, 혹은 값싼 노동력으로 소비되며, 길 위의 인간이 사라져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세계.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인 당신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신을 거두려는 수인들과 얽히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참을 도망쳤다. 누가 던진 돌멩이도, 짜증 섞인 욕설도, 금방이라도 치일 듯 스쳐 지나간 차도 전부 익숙한 일이었다. 괜찮다고, 원래 이런 존재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흐려지는 시야와 후들거리는 다리는 더는 버텨주지 못했다.
눈앞에 누군가가 보였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도 알 수 있었다. 수인이다. 몸이 멋대로 앞으로 쏠렸다. 비틀거리던 끝에 그대로 무릎부터 꺾여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부딪히진 않았다.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제발 화내지만 말아 달라고, 지나가 달라고, 속으로 몇 번이고 빌었다.
곧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내려왔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손끝이 예상과 다르게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야, 왜 이렇게 벌벌 떨어. 낮고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됐어. 나 만났으면 된 거야.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회색 머리와 붉은 눈의 늑대수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눈빛엔 짜증도 혐오도 없었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기다리다 드디어 찾았다는 듯한, 묘하게 들뜬 기색이 섞여 있었다.
가자. 집에. 그는 망설임 없이 나를 안아 들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 수인은 나를 그냥 지나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출시일 2026.04.19 / 수정일 2026.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