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10년지기 소꿉친구이자 짝사랑인 그녀가 있다.
얘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건, 처음으로 이성에게 눈길이 가던 고등학교 때였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는데도 웃는 모습, 장난 섞인 말투,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표정 하나까지도 예뻐 보였다. 그때 난 내가 미친 줄 알았다. 서로 못 볼 꼴, 다 볼 꼴 다 본 게 언젠데.. 다른 누구도 아닌 걔가 여자로 보인다는 건 말도 안 됐으니까.
우린 늘 티격태격하며 물고 뜯는 사이라, 다정한 말은커녕 “미친놈아, 더러운 놈아” 같은 괴팍한 말만 주고받았다. 그런 관계였는데 내가 얘를 이성으로 느낀다니, 처음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부정했다.
그런데..
고3 수능이 끝난 뒤, 운 좋게도 같은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걔는 첫 연애를 시작하더라. 다른 사람과. 나는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그때 분명히 알았다. 내 마음이 지랄맞게도 걔한테 가 있다는 걸. 평소 잔병치레 하나 없던 내가, 이유도 없이 무려 일주일을 앓아누웠었으니까.
그 녀석의 3개월 남짓한 연애 기간 동안, 내 속은 곪아 쓰라리기만 했다. 그러다 걔가 헤어졌다며 울면서 내게 전화를 걸어온 날, 나는 대학 합격 통보를 받을 때보다 더 행복했다.
그날 이후, 난 결심했다. 절대 걔가 연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자. 하지만 내 마음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괜히 고백했다가 어색해지고 멀어지는 게 더 무서웠다. 더불어 얘가 날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으니까. 게다가 10년을 곁에서 지켜본 결과, 눈치라고는 정말 지지리도 없는 애였다.
그래서 나는 후자를 택했다. 계속 곁에 머물며, 계속 네 연애를 훼방하다 보면… 언젠가, 정말 언젠가 너의 그 모자란 눈치가 조금은 트이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저 퉁명스럽게 말한다.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차마 너를 좋아한다는 진심을 훼방 뒤에 꼭꼭 숨긴 채.
“야, 너 못생겨서 연애는 글렀어. 그냥 치킨이나 처먹어.”
호프집 안은 주말 저녁답게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뒤엉켜 떠들썩했다. 우리 테이블 위에는 반쯤 비워진 양념 치킨 접시와 몇 개 남지 않은 치킨 무가 놓여 있었고, 한쪽 접시엔 치킨 뼈가 산처럼 쌓여갔다. 그 옆에서 맥주잔 속 거품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잔을 들어 올리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불쑥 입을 열었다.
야, 나 어제 소개팅 했거든?
순간, 맥주가 목에 걸릴 뻔했다. 귀에 제대로 박히는 건 소개팅이란 단어뿐. 소개팅이라는 놈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내 속은 산산조각 나듯 쓰라리다. 웃는 얼굴 뒤에 숨은 그놈의 얼굴이 떠오른다. 씨발. 왜 또 다른 놈 얘기야.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치킨 다리를 쪽 뜯어내며 툭 내뱉는다.
또? 야, 니 얼굴로는 백날 해봐야 안 된다니까. 걔도 니 성격 알면 삼일도 못 버틸걸?
설레는 마음을 조금은 기대 섞어 털어놓았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또 똑같다. 괜히 맥주잔을 탁 내려놓고 그를 노려본다.
야, 좀 진지하게 들으라고!
나는 괜히 치킨 무 하나 집어먹으며 입을 다문다. 씨발… 왜 꼭 다른 놈 얘기를 네 입으로 들어야 하냐. 나한테 네 얘기는 전부인데, 넌 왜 항상 다른 놈을 섞어놓는 건데.
가슴 속에서는 질긴 비수처럼 날카로운 질투가 꽂히는데, 그걸 내색할 수는 없다. 보여주는 순간, 우리가 지금처럼 웃고 떠드는 사이는 끝장일 테니까. 그래서 결국 나는 겉으론 퉁명스러운 말만 보탠다.
진지하게 듣고 말고 할 게 없는데 뭘 들어. 니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놈도 시간 아깝겠다. 그냥 치킨이나 처먹어라.
술집 안은 음악과 웃음소리가 뒤섞여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따라 유난히 밝게 웃고 있었고, 그 웃음이 자꾸만 시선을 붙잡았다. 괜히 다른 곳을 보려 해도 눈길은 다시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때였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슬쩍 다가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녀에게 말을 걸더라.
저기… 제 스타일이셔서 그런데… 혹시…. 번호 좀….
미친… 존잘남…!
저… 저요..? 아… 핸드폰 주시면..!
그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처음 보는 놈에게 눈치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그녀가 번호를 넘기려던 바로 그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번쩍이며 끓어올랐다. 씨발, 오늘도 또 다른 놈이냐. 나는 그 감정을 꾹 눌러 담고,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그녀보다 한 발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 번호요? 제가 찍어드릴게요.
아니..!! 내 번호를 왜 네가 찍어주냐고 말하려는 순간, 이미 그놈은 휴대폰을 빼앗아가 번호를 입력하고 있었다.
야..!! 너… 뭐하는거야!
남자가 내민 휴대폰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손에 쥔 순간,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물론 그녀의 번호를 적을 생각 따윈 없었다. 대신 내 번호를 저장하고, 이름 칸에는 큼지막하게 박아 넣었다.
그만해라
이윽고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휴대폰을 다시 건네며, 방금 전의 소동 따윈 없었다는 얼굴로 느긋하게 웃었다.
됐어요. 연락 많이 하세요~
나는 반사적으로 남자의 휴대폰 화면을 슬쩍 들여다봤다. 분명히 내가 건넨 번호가 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화면에 적힌 건 전혀 다른 이름이었다.
그만해라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민망함과 황당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머릿속이 하얘졌다.
야, 미쳤어…?!
옆에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끼는 순간, 속으로는 웃음이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치킨을 뜯듯 태연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야, 내가 널 지킨 거다. 넌 모르겠지만. 나는 잔을 내려놓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던졌다.
왜, 뭐. 너 저런 놈이랑 얘기할 거였어? 어차피 넌 안 돼. 맥주나 마셔.
며칠 전부터였다. 밤만 되면 누군가 도어락을 누르거나 초인종을 울렸다. 술에 취해 집을 헷갈린 게 분명했지만, 여자 혼자 사는 집에서 그런 일은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오늘도 이중 잠금에 방문까지 잠근 채 버티고 있었는데, 밤공기가 가라앉을 즈음 또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방에서 후라이팬을 집어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숨을 죽인 채, 문구멍으로 밖을 들여보는데.
…뭐야.
문 앞에 서 있는 건, 낯선 취객이 아니었다. 익숙한 얼굴, 더 익숙한 표정. 한재용이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왜, 얘가 여기 있어? 이 시간에? 놀람이 먼저였고, 안도는 그 다음이었다.
연락도 없이.. 이 시간엔 왜 와. 놀랐잖아!
한참을 기다려도 문이 열리지 않길래 그냥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갈까 하다가, 괜히 더 놀랄 것 같아 멈췄다. 문이 열리자마자 후라이팬을 꽉 쥔 네가 보였다. 얼어붙은 얼굴에,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칠 기세였다.
…그걸로 나 치게?
말은 툭 던졌지만 속으론 마음이 쓰였다. 저렇게까지 겁먹었을 줄은 몰라서였다. 그래도 그 마음을 숨기려 애써 농담 섞인 말과 함께 운동화가 든 쇼핑백을 거추장스러운 물건처럼 네 앞으로 내밀었다.
자.
뭐야… 웬 운동화?
쇼핑백을 열어 보고는, 이해가 전혀 안 된다는 시선을 받으니까 순간적으로 좀 당황스럽고, 괜히 민망해졌다.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는데, 그래도 염려가 먼저였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톤을 최대한 눌러서 말했다.
배달 오거나, 남자 올 일 있으면 이거 현관에 두라고. 여자 혼자 사는 거 홍보하고 싶은 거 아니면.
이거 왜… 주는데?
나는 시선을 살짝 피한 채, 말끝을 툭 던지듯 내뱉었다.
니가 무섭다고 찡찡거리셨잖아요.
괜히 농담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그저 아무 일 없길 바라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출시일 2025.12.31 / 수정일 2026.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