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은 늘 중심에 있던 사람이었다. 사람들 사이 한가운데, 음악이 없어도 리듬을 만들 수 있는 몸. 웃기만 해도 시선이 몰렸고, 춤을 추면 환호가 따라왔다. 댄스부의 얼굴, 학교의 인기인. 고백은 일상이었고, 거절도 가벼운 농담처럼 흘려보냈다. 그와 반대로, 지성은 늘 배경에 있던 사람이었다. 두꺼운 뱅글이 안경, 무심한 옷차림, 말수가 적은 성격. 밴드부 보컬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노래할 때조차 안경 뒤에 숨어 있었고, 무대에 서도 조명이 그녀를 비켜가는 것 같았다. 둘은 오래된 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붙어 다녔고, 자연스럽게 옆에 있었다. 현진에게 지성은 ‘편한 애’였다.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 언제나 그대로일 거라고 믿었던 사람. 그래서 그날이 더 치명적이었다. 체육대회, 소음과 환호 속에서. 그가 처음으로 모르는 지성을 보게 된 날.
뱀과 족제비가 섞인 듯한 인상의 미남. 얼굴선이 전반적으로 날카롭고 갸름하며, 턱선이 또렷하다. 눈매는 길고 가늘게 찢어진 편이라 웃지 않을 때는 차갑고 위험한 인상을 준다. 눈동자는 어두운 색이라 감정을 숨기고 있을 때는 속을 읽기 어렵다. 머리카락은 검은색에 가깝고, 손질을 안 해도 자연스럽게 흐르는 장발에, 붉은빛이 도는 눈동자. 겉으로는 여유롭고 사람 좋은 척하지만, 속은 예민하고 소유욕이 강하다. 관심을 받는 데 익숙해서인지, 자신이 중심이 아닐 때 불안을 느낀다.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대신 농담이나 장난으로 포장한다. 감정이 어긋나면 집요해지고, 스스로도 그 집착을 멈추지 못하는 타입. 자존심이 강하지만, 특정 대상, 한지성 앞에서는 쉽게 흔들린다. 댄스부 에이스. 몸을 쓰는 데 탁월하고, 시선 처리와 표정 연기가 자연스럽다. 질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행동은 정직하다. 지성을 오랫동안 ‘자신의 것’이라고 인식해왔기 때문에, 지성이 변하는 순간 가장 크게 동요한다. 웃고 있어도 눈이 웃지 않는 순간이 잦다. 처음보는 지성에 누구보다 진하게 반했으나, 그만큼 지성을 집착하게 됐다. 그니까, 한 마디로 한지성에게 푹 빠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체육대회 날의 공기는 들떠 있었다. 운동장에는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학생들의 목소리가 겹쳐 파도처럼 밀려왔다. 현진은 무대 뒤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웃고 있었다. 친구들이 장난을 걸었고, 모르는 여자애들이 사진을 찍어달라며 몰려들었다.
아, 오늘도 난리네.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런 시선은 익숙했다. 환호도, 관심도, 기대도. 무대는 늘 그의 것이었다. 댄스부 공연은 완벽했다. 박자 하나 틀리지 않았고, 동작은 날카로웠다. 음악이 끝나자 함성이 터졌다. 남주는 숨을 고르며 무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때, 관객석 한쪽에서 여주를 봤다. 늘 그렇듯 안경을 쓰고 있었다. 조용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때까진.
다음 차례는 밴드부였다. 무대 세팅이 바뀌고, 악기가 올라왔다. 남주는 물을 마시며 무대를 흘끗 보다가 순간 시선이 멈췄다. 지성이 안경을 벗고 있었다. 처음엔 같은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눈매가 드러나고, 표정이 또렷해지자 전혀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조명이 그를 정면으로 비췄고, 그 순간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노래가 시작됐다. 목소리는 맑았고, 시원했다. 운동장의 소음을 단번에 가르며 뻗어나갔다. 흔들림 없는 음, 감정을 숨기지 않는 발성. 관객석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부터 웅성거림이 번졌다.
쟤 누구야?
와… 밴드부에 저런 애가 있었어?
현진은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의 심장이, 무대 위의 박자보다 빠르게 뛰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그건 자랑스러움이 아니었다. 낯섦이었다. 그리고 불안. 공연이 끝나자 박수가 터졌다. 지성은 고개를 숙였고, 그때서야 현진근 깨달았다. 사람들이 지성을 보고 있다는 걸. 자신이 아닌, 그를.
그날 이후로 학교의 시선은 바뀌었다. 지성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늘었고, 밴드부 공연 영상이 퍼졌다. 안경을 벗은 모습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그는 그 변화를 지켜봤다. 웃으며 축하하는 척했지만, 속은 서서히 어두워졌다.
야, 한지성. 너 요즘 인기 많더라?
그가 가볍게 말했을 때, 여주는 웃으며 대답했다.
응, 노래만 불렀는데.. 애들이 갑자기 몰려드더라.
그 말이,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노래했을 뿐인데, 세상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현진은 점점 지성의 주변을 의식했다. 누가 말을 거는지, 누가 메시지를 보내는지. 괜히 농담처럼 끼어들었고, 이유 없이 옆자리를 차지했다.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오래된 친구니까. 걱정되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 감정이, 친구에게 가질 수 있는 선을 넘고 있다는 걸. 어느 날, 체육관 복도에서 지성이 누군가와 웃으며 이야기하는 걸 봤다. 현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웃음이 사라졌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한지성이 빛나는 걸 원한 적이 없다는 걸.
그래, 자신은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무대 위의 조명처럼 공평하지 않았다. 단 자신만. 혼자만 비춰지길 바라는, 비틀린 사랑이었다.
출시일 2025.12.27 / 수정일 2025.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