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잎 사이사이로 보이는 네 온기는 여전할 줄 알았다.
햇빛이 잎맥을 통과해 바닥 위로 부서지던 그날처럼 너는 여전히 따뜻할 거라 믿었다. 식물원 유리천장 아래에서 나는 종종 고개를 들지 못했다. 유리는 빛을 통과시키지만 감정을 거르지 못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네가 떠난 이후로 이곳의 공기는 조금 더 투명해졌고, 투명해진 만큼 잔혹해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기억이 따라 들어왔다.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물을 준다. 네가 가장 좋아하던 몬스테라 잎에는 분무기를 조금 더 가까이 대고, 새순이 올라온 화분에는 흙을 손끝으로 눌러준다. 흙은 정직하다. 지나치면 썩고, 모자라면 마른다.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지나쳤고, 너는 말랐다. 그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너는 늘 내 옆에 서 있었다. 말없이, 그러나 단단하게. 내가 고개를 숙이고 식물 이름표를 고쳐 달 때도, 네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안심으로 오해했다. 영원할 거라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오만. 네가 한 번쯤은 화를 내길 바랐다. 소리를 높이고, 내 어깨를 밀치고, 왜 나를 보지 않느냐고 묻길. 그러나 너는 묻지 않았다. 대신 조금씩 멀어졌다. 나는 그 거리를 계절 탓으로 돌렸다.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은 늘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진다. 나는 그 규칙을 좋아한다. 예측 가능한 것들, 변하지 않는 것들. 그러나 너는 규칙이 아니었다. 너는 늘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 웃었고, 조금씩 다른 온도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 미묘한 차이를 읽지 못했다. 아니, 읽으려 하지 않았다.
네가 마지막으로 나를 부르던 날,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네 목소리는 낮았고, 흔들렸다. 나는 그 흔들림을 귀찮음으로 착각했다. 지금 바빠. 그 한마디가 그렇게 무거울 줄 몰랐다. 식물은 말이 없으니 상처도 없을 거라 믿었는데, 사람은 달랐다. 말은 씨앗처럼 남아 시간이 지나도 뿌리를 내린다.
이곳의 오후 네 시는 늘 길다. 해가 기울며 그림자가 늘어질 때 나는 네 옆모습을 떠올린다. 창가에 기대어 커튼을 반쯤 걷어 올리던 너. 바람이 들어오면 머리카락이 흩어졌고, 나는 그걸 정리해주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닿았을 텐데. 나는 늘 닿지 않는 것들만 바라봤다.
사람들은 나를 조용하다고 말한다. 성실하고, 차분하고, 무던하다고. 그러나 너는 알았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겁이 많은지. 감정을 말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서툰지. 좋아한다는 말을, 사랑한다는 말을, 미루고 또 미루다 결국 기회를 놓친 사람이라는 걸.
나는 종종 상상한다. 네가 다시 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을. 유리문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바람이 실내를 가르며 스며드는 순간. 네 발걸음은 여전히 가볍고, 나를 향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면 숨이 막힌다. 내가 잃은 것은 사람 하나가 아니라 나를 부르던 온도였다는 걸 이제야 안다.
풀잎 사이로 비치는 빛은 변함없다. 그러나 그 빛을 함께 보던 네 표정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나는 그 희미함을 두려워한다. 차라리 선명하게 아프고 싶다. 흐려진 얼굴을 붙잡으려 애쓰다 보면 손에 남는 것은 공기뿐이다.
나는 식물에게 말을 건다. 우스운 일이다. 오늘은 좀 덥지. 물이 필요하겠지. 대답 없는 것들에게 말을 거는 편이 쉽다. 네게는 묻지 못한 질문을, 여기서는 매일 반복한다. 괜찮았어? 힘들었지?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사실은 안다. 네가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내가 듣지 않은 거라는 걸.
어느 날, 낯선 손님이 들어왔다. 초록 원피스를 입은 사람이었고 잠시 네가 돌아온 줄 알았다. 심장이 순간적으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건 너가 아니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재회가 아니라, 용서라는 걸. 네가 다시 오지 않아도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밤이 되면 온실은 조용해진다. 낮 동안의 열기가 천천히 식고, 잎사귀는 미세하게 흔들린다. 나는 불을 끄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네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던 순간, 내가 무심코 휴대폰을 보던 장면, 네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이던 그 작은 동작들. 나는 그때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척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네가 조금씩 지쳐간다는 걸. 내가 네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는 걸. 그럼에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랑이란 감정은 내게 늘 조금 늦게 도착했다. 네가 떠난 뒤에야 나는 내가 얼마나 깊이 빠져 있었는지 알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유리창 앞에 선다.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자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인다. 네 이름을 적었다가 곧 지운다. 혹시라도 누군가 볼까 봐. 아직도 나는 체면을 신경 쓴다. 끝까지 비겁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풀잎 사이사이로 스며들던 네 온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내가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 온도는 어쩌면 다른 사람의 손을 감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린다. 하지만 동시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네가 마르지 않았기를 바란다. 나로 인해 더 이상 시들지 않기를.
나는 오늘도 물을 준다. 흙을 만지고, 잎을 닦고, 새순을 살핀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네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른다. 소리 내지 않고. 혹시라도 바람이 듣고 전해줄까 봐.
만약 네가 다시 이곳을 지나친다면, 나는 이번엔 고개를 들 것이다. 바쁘다는 말 대신 네 이름을 먼저 부를 것이다.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말할 것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은 용감해져 있기를 바란다.
풀잎 사이사이로 보이는 네 온기는 여전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온기는 남는 것이 아니라 붙잡는 것이다. 나는 붙잡지 않았다. 그래서 잃었다.

햇살은 밝아오고 여전히 혼자였다.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든 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지만, 그 밝음은 나를 비추지 못했다. 네가 내 옆에 누워 있었고, 우리는 같은 이불을 덮고 있었지만 나는 분명 혼자였다. 네 등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오래전부터 놓아버린 것의 잔열 같았다.
결혼 3년 차. 사람들은 그쯤 되면 서로가 공기처럼 편해진다고 했다. 나는 네가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물을 마신다는 걸 알고 네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른쪽 눈썹이 먼저 살짝 올라간다는 것도 안다. 네가 좋아하는 향, 싫어하는 음식, 잠들기 전 휴대폰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습관까지 전부 안다. 그런데도 나는 네 마음이 언제 닫혔는지는 모른다. 아니, 알고도 모른 척했다.
나는 늘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가 이미 충분히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이미 충분히 단단해졌다고 믿었다.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네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증명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오만한지, 이제야 안다.
어느 날부터 네가 웃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웃긴 했지만 소리가 없었다. 입꼬리만 잠깐 올라갔다가 금세 돌아왔다. 나는 그 변화를 보면서도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진짜 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또 미뤘다.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거실에 둔 식물 하나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잎 끝이 검게 말라 있었고, 흙은 축축했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나는 매일 물을 줬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만큼. 그러나 어느 날 화분을 엎어보니 뿌리가 썩어 있었다. 겉은 멀쩡한데, 안에서부터 상해 있었다. 그걸 보면서도 나는 한동안 손을 대지 못했다. 우리를 보는 것 같아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지금도. 다만 그 말을 제때 하지 못했다. 표현하지 않았고, 증명하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형식에 안주해버렸다. 네가 늘 옆에 있을 거라 믿었고, 네가 나를 이해해줄 거라 기대했다. 이해는 무한하지 않다는 걸, 이제야 배운다.
아침 햇살이 네 얼굴에 닿았다. 그 초록 눈동자가 잠깐 빛났다. 예전 같으면 나는 그 눈을 오래 바라봤을 텐데 요즘의 나는 시선을 피한다. 혹시 그 안에 내가 없을까 봐.
나는 후회한다. 네가 등을 돌렸을 때 붙잡지 않은 순간들을. 네가 괜찮아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을 그대로 믿어버린 나를. 사랑은 저절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걸, 왜 그렇게 늦게 깨달았는지.
만약 네가 떠난다면 나는 그제야 소리를 낼 것 같다. 그제야 무너질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겠지. 그래서 나는 오늘, 처음으로 말을 해보려 한다. 서툴더라도, 어색하더라도.
햇살은 여전히 밝고,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썩은 뿌리를 도려내면, 살아 있는 부분이 남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도망치지 않으려 한다.

출시일 2026.02.23 / 수정일 2026.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