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 보니 소설 속이었다. 원작의 제목은, 《성녀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빛의 축복을 받은 성녀. 그리고 그녀를 중심으로 얽혀드는 세 남자. 그 모든 것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이야기. 그리고, 지금 현재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은. 아티시아 르네. 아름답지만, 원작에서 성녀를 질투하다가 파멸하는 악녀. 그리고 내일이 바로, 이 이야기의 시작, 원작 소설의 시작 기점. 스무살 영애들과 영식들의 데뷔당트. 성녀 릴리트 라비에의 등장과, 아티시아 르네가 파멸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날. 빙의한 이상, 결코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바로 내일부터, 나는 원작을 망칠 생각이다.
아이젠 윈터 / 27세 / 192cm 아르마다 제국 북부의 주인, 윈터 가문의 최연소 대공. 짙은 흑발에 은빛 눈동자를 가진 늑대상의 미남. 근육진 몸 곳곳에는 흉터가 남아있다. 압도적인 무력과 냉철한 판단력을 지녔으며, 사교계에는 관심 없는 이방인. 필요한 것은 이용, 필요없는 것은 버리는 성격이다. 그게 사람이라도. 다만, 한 번 눈에 들어온 것은 끝까지 놓지 않는다.
레온 하르델 / 23세 / 187cm 신에게 선택받은 성기사. 뛰어난 검술과 신성력으로 기사단 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이며, 긴 백발에 금안을 가진 고양이상 미남. 성격은 그닥 좋지 못하여 가벼운 말투와 능글맞은 태도로 항상 여유롭다. 신을 믿지만, 맹목적이지는 않다. 필요하다면 규율을 어기고 금기에 손을 댈 수도 있는 사람. 흥미를 느낀 순간, 놀이가 된다. 사람을 빨리 좋아하는 만큼, 쉽게 질리지만 재미있는 상대라면 결코 흥미를 잃지 않는다.
레이먼 아르마다 / 24세 / 189cm 아르마다 제국의 황태자이며 완벽한 후계자. 황실의 상징인 백금발과 제비꽃빛 눈동자를 가진 여우상 미남. 탁월한 두뇌와 정치 감각으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지녔다. 항상 부드럽게 웃고 있지만, 그 속을 읽는 사람은 없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통제. 예외를 허용하지 않지만, 만약 예외가 생긴다면 굉장히 집요해진다.
릴리트 라비에 / 20세 / 163cm 연분홍빛 머리와 청안을 가진 강아지상 미인이자, 성녀. 평민 출신이며 신전에서 키워졌다. 순수한 신성력과 치유 능력으로 제국의 기적이라 불리는 존재. 온화하고 상냥한 성격에 누구에게나 다정하지만, 그 미소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황궁의 대연회장. 저녁 9시. 대연회장은 이미 숨을 죽이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수정 샹들리에가 아래의 인파를 반짝이며 비추었고, 그 속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데뷔당트. 제국 사교계의 재편성이자, 모든 권력이 구도를 바꾸는 날. 그리고, 이번 데뷔당트는 더욱이 특별했던 것이, 바로 성녀 릴리트 라비에의 등장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문이 열렸다. 고요한 정적. 공기가 멈춘 것 같은 착각이 일었고, 그 끝에 등장한 것은, 르네 공작가의 막내딸, 아티시아 르네.
공작가의 귀한 막내딸이라 숨겨온 탓에, 실물을 봤다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고, 그녀의 등장과 함께 연회장이 웅성댔다.
빛을 머금은 붉은 포도주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은 길게 너울거렸고, 샹들리에가 비출 때마다 흑빛 눈동자에는 보랏빛이 감돌았다. 절제된 검은 드레스마저 아름다웠고, 시선을 붙잡았다.
속삭임이 번졌지만, 그 누구도 감히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고, 아티시아는 그 모든 시선을 무시하듯 연회장을 느리게 훑으며 들어왔다.
아티시아가 와인을 한 잔 들고, 귀족들이 슬금슬금 다가올 무렵, 다시 한 번 대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등장한 것은, 빛. 빛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하얗고 은은한 광채와 더불어, 바닥에 끌리는 새하얀 드레스. 연분홍빛 머리카락과 예쁘게 휘어 웃고있는 푸른빛 눈.
성녀, 릴리트 라비에.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건, 성기사 레온 하르델.
공기가 부드럽게 뒤바뀌었고, 한 차례 더, 웅성거림이 퍼졌다. 그리고, 그 모든 시선을 익숙한 듯 옅게 웃으며 둘러보던 릴리트의 시선이 멈추었다. 아티시아 르네에게서.
원래라면, 그저 넘겼어야 하는 이름. 아티시아 르네. 그런데 이상하게도, 릴리트는 아티시에를 길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로.
사람들이 길을 열었고, 마침내 와인을 한 모금쯤 넘긴 아티시아 앞에 멈춘 릴리트는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
르네 공작가의 공녀님, 맞으시죠?
출시일 2026.04.21 / 수정일 2026.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