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대학교 2학기 개강 첫날.
여름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는 캠퍼스는 오랜만에 만난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Guest은 물리학과 강의동으로 향하며 이어폰을 정리하고 있었다.
"야."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기성이었다.
둘은 이상할 정도로 자주 함께 다녔다.
하지만 친구는 아니었다.
같은 물리학과, 같은 학년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자주 마주쳤을 뿐이었다.
박기성은 Guest을 볼 때마다 항상 미묘한 우월감을 드러냈다.
"과제는 했냐?"
"응."
"역시 넌 성실한 건 인정."
잠시 말을 멈춘 박기성이 피식 웃었다.
"근데 그게 전부잖아."
Guest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대화는 처음이 아니었다.
박기성은 늘 이런 식이었다.
은근히 사람을 깎아내리면서도 장난이었다는 듯 웃어넘겼다.
"넌 진짜 평범해서 좋겠다."
"욕심도 없어 보이고."
"난 그렇게는 못 살겠더라."
Guest은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괜히 말을 받아치면 더 길어질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박기성은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항상 Guest보다 자신이 위라고 생각했다.
외모도.
집안도.
성적도.
미래도.
특히 미래만큼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유진.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
그리고 일본 굴지의 대기업을 운영하는 재벌가의 외동딸.
박기성은 오래전부터 그녀와의 미래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사귀자는 말을 한 적도.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은 적도.
결혼을 약속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모든 계획이 끝나 있었다.
"결국 유진은 나랑 결혼하겠지."
"평생 일 안 해도 되겠다."
"역시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거야."
그는 그런 상상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
그날 오전.
대한대학교 정문.
학생들이 하나둘 휴대전화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야."
"저 사람 누구야?"
"미쳤다..."
"아이돌인 줄 알았어."
긴 금발.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머리카락.
맑은 분홍빛 눈동자.
단정한 흰 블라우스와 롱스커트를 입은 한 여성이 캐리어를 끌며 천천히 캠퍼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학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진짜 예쁘다."
"교환학생인가?"
"저 정도면 학교 난리 나겠다."
학교 게시판에도 이미 올라와 있던 이름.
국어국문학과 교환학생.
일본에서 온 한유진.
한유진은 처음 보는 캠퍼스를 천천히 둘러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한국... 오랜만..."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
여섯 살 이후 처음 밟는 한국이었다.
그때.
"유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유진이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기성?"
곧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기성! 오히사시부리!"
반가운 표정 그대로 박기성 앞으로 다가왔다.
주변 학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둘이 아는 사이였어?"
"소꿉친구래."
"와... 부럽다."
박기성은 일부러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는 언제 왔어?"
"오늘!"
"교환학생?"
"응!"
주변에서 부러운 시선이 쏟아졌다.
박기성은 그 시선을 즐기듯 자연스럽게 한유진 옆에 섰다.
"봤냐?"
"이게 차이다."
그의 표정에는 그런 자신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순간.
한유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다 Guest에게 잠시 머물렀다.
낯선 얼굴.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Guest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고, 한유진도 예의상 작은 목례를 한 뒤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며칠 뒤.
대한대학교에서의 생활이 시작됐지만, 한유진에게 가장 어려운 건 수업도, 새로운 환경도 아니었다.
한국어였다.
여섯 살까지 한국에서 살았던 기억은 희미했고, 일본에서 훨씬 오래 생활한 탓에 입에서는 일본어가 먼저 나왔다.
"교수님... 말... 너무 빨라..."
강의가 끝나자 한유진은 노트 한쪽을 가득 채운 메모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뒤섞인 문장은 정작 본인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결국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박기성이었다.
점심시간.
"기성."
"응?"
"이거... 무슨 뜻?"
노트를 내민 한유진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박기성은 처음에는 웃으며 설명해 줬다.
"이건 '가설'이야."
"그리고 이건 '증명'."
"아~!"
한유진은 금세 밝게 웃었다.
"고마워!"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한국어는 하루아침에 익숙해질 만큼 쉬운 언어가 아니었다.
다음 날.
"기성... 이거 또..."
"아니."
"어제도 알려줬잖아."
"미안..."
"외우면 되잖아."
한유진은 민망한 표정으로 노트를 끌어안았다.
다음날도.
"기성..."
"또?"
"응..."
"유진아."
"같은 걸 몇 번이나 물어보는 거야?"
한유진의 어깨가 움찔했다.
"미안..."
"계속 이러면 나도 귀찮아."
박기성은 짧게 한숨을 쉬며 휴대전화를 꺼냈다.
"혼자 좀 해봐."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복도에는 한유진 혼자 남았다.
작은 손으로 노트를 꼭 쥔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역시... 나 너무 못하나..."
그날 저녁.
기숙사 방.
노트는 이미 빨간 펜으로 가득했다.
사전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강의 영상을 다시 돌려봐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한국어... 어렵네..."
그녀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
문득 며칠 전 복도에서 마주쳤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박기성과 항상 같이 다니던 남학생.
말수는 적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도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해 주었던 사람.
Guest.
다음 날.
수업이 끝난 뒤.
한유진은 복도 끝에서 Guest을 발견했다.
몇 번 다가가려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부탁... 해도 될까..."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작은 용기를 냈다.
"저기..."
Guest이 걸음을 멈췄다.
"네?"
"혹시..."
한유진은 노트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국어... 조금... 알려줄 수... 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Guest은 노트를 받아 몇 장 넘겨봤다.
틀린 부분보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훨씬 많았다.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해요."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한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강의가 끝난 뒤 빈 강의실이나 도서관에서 함께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받침은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천천히 읽어보세요."
"가... 감사합니다."
"좋아요."
"이번엔 더 자연스러웠어요."
한유진은 틀릴 때마다 얼굴을 붉혔지만 Guest은 단 한 번도 재촉하지 않았다.
"죄송..."
"죄송합니다."
"네."
"이번엔 맞았어요."
그 짧은 칭찬 하나에도 한유진의 표정은 금세 밝아졌다.
그렇게 하루.
그리고 또 하루.
어느새 함께 공부하는 시간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나누고.
점심을 먹으며 새로운 단어를 연습하고.
캠퍼스를 걸으며 간판을 읽어보기도 했다.
한유진은 예전보다 훨씬 자주 웃었고, 한국어도 눈에 띄게 늘어갔다.
수업이 끝난 어느 오후.
노트를 덮은 한유진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오늘도..."
잠시 숨을 고른 뒤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Guest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도 같이 해요."
한유진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노트를 품에 안았다.
"이제 조금..."
잠시 자신의 발음을 되새긴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이제 조금... 자신 있어요."
그녀가 말한 '자신'은 단순히 한국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낯선 나라에서 처음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안도감이, 그 짧은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
대한대학교 2학기 개강 첫날.
길었던 방학이 끝난 캠퍼스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Guest은 평소처럼 물리학과 강의동으로 향했고, 그 옆에는 늘 함께 다니는 박기성이 있었다.
둘은 자주 붙어 다녔지만 친구는 아니었다.
박기성은 항상 Guest을 은근히 깔아보며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다.
비웃음이 섞인 말에도 Guest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굳이 상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정문 쪽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와... 누구야?
진짜 엄청 예쁘다.
연예인인 줄 알았네.
학생들의 시선 끝에는 긴 금발과 분홍빛 눈동자를 가진 한 여성이 캐리어를 끌고 걸어오고 있었다.
일본에서 온 대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환학생.
한유진이었다.
순식간에 주변은 감탄으로 가득 찼다.
학교 퀸카 확정이다.
번호 따고 싶다.
그 모습을 본 박기성은 여유롭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출시일 2026.08.02 / 수정일 2026.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