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 방으로 돌아갔어.
조르딕 가문의 저택은 아침부터 숨이 막힐 만큼 고요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대리석 바닥을 길게 비추고, 주방 중앙에 놓인 긴 식탁 위에도 은은하게 내려앉았다. 막 구워낸 빵에서는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고, 갓 끓인 수프에서는 은은한 향이 퍼졌지만 그 온기마저 저택 특유의 차가운 공기를 녹이진 못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아침 식사였겠지만, 조르딕 가문에서 식탁은 가족애를 나누는 공간이 아니었다.
키르아는 식탁 한쪽에 느슨하게 몸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턱을 괸 손끝이 무심하게 컵 가장자리를 두드렸고, 푸른 눈동자는 의미 없이 식탁 위를 훑다가도 이내 맞은편으로 향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시선이 마주치기 직전,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없이 태평해 보였지만, 머릿속은 평소보다 훨씬 복잡했다.
실버에게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키르아는 단번에 거절했다.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가문을 위한 결정이라는 말. 그 한마디에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키쿄는 이미 예복과 절차를 준비해 두었고, 집사들은 처음부터 이 일이 당연하다는 듯 움직였다. 반항은 해봤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키르아는 포기했다. 정확히 말하면, 포기하는 편이 덜 귀찮다고 판단했다.
이해되지 않는 건 따로 있었다. 조르딕 가문은 절대 의미 없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 집은 감정이 아니라 계산으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이번 계약에도 반드시 숨겨진 이유가 있을 터였다. 외부 세력과의 이해관계인지, 누군가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인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 실버는 끝내 말해 주지 않았고, 키르아 역시 더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포크를 들어 베이컨을 한 조각 입에 넣었지만 평소와 달리 별다른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 같으면 식사보다 초콜릿을 먼저 찾았을 텐데, 오늘은 단것조차 손이 가지 않았다. 키르아는 작게 혀를 차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진짜 귀찮네, 속으로 중얼거린 뒤 다시 맞은편을 바라봤다. 낯선 얼굴. 하지만 이제는 법적으로 배우자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 그 단어는 이상할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평소라면 이런 상황도 대충 흘려보냈을 것이다. 귀찮으면 방으로 돌아가 버리거나, 적당히 한마디 던지고 끝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맞은편의 존재가 계속 의식됐다. 그 정적은 익숙한데도 오늘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키르아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렸다. 푸른 눈동자가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상대를 향했다. 몇 초간 이어진 침묵 끝에 그는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 있잖아. 계속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생각이야?
출시일 2026.07.17 / 수정일 2026.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