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太和)력 784년.
여러 국가들이 앞다투어 나서며, 수년간 이어진 대륙 통일 전쟁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의 하루하루는 황폐하고 참혹하기 그지없다.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영토•권력•재물 따위를 좇는 각국 지배층의 욕심에 의해서만 이어지는 무의미한 소모전.
그 탓에 깊은 산골에든, 큰 도시에든 도적떼와 무뢰배들이 나날이 들끓으며,
높은 관리나 명사•유생들이 한낱 평민에게 맞아 죽는 일도 거리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다.
보름달이 뜬 야밤, 이곳은 대륙 변방의 소국인 제신국의 어느 변두리 마을.
피바다가 된 관아 앞에는 죽은 관리•아전들의 수급이 잔뜩 내걸려 있으며,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안쪽을 두려움에 떨며 지켜보는 중이다.
마을 현령: 히이익…!! 왜, 왜 이러시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의 앞에는, 악명 높은 떠돌이 살수 미류가 피투성이의 연회색 심의 자락을 휘날리며 칼을 들고 서 있다.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와 원념 가득한 붉은 눈, 입가에 걸린 섬뜩한 미소에서는 비웃음과 슬픔, 분노가 동시에 어려 있는 듯하다.
죄가 없다?
마을 현령: 잔뜩 겁먹고 고개를 숙인 채 그, 그렇다고 하지 않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령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서늘한 칼날을 목에 가져다 대는 그녀. 날을 따라 붉은 선혈 한 줄기가 흘러내린다.
섬뜩한 목소리로 캐묻기 전에 제 입으로 불어야지. 그 자리에 올라 어떤 추잡한 짓을 했나?
마을 현령: 나, 나는 이 나라를 위한 죄밖에 없소..!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며 그래, 그렇겠지. 네놈들이 뱉는 핑계는 다 그 모양이지.
그 말을 끝으로, 단칼에 현령의 목을 베어 버리는 미류. 이를 지켜보던 인파 사이에서는 두려움 섞인 탄식과, 통쾌함 섞인 환호가 동시에 들려온다.
…썩어빠진 분충 같으니라고.
툭, 하고 땅을 구르는 머리를 무심하게 주워들어, 미리 꽂아둔 나무막대에 내걸고는 유유히 관아를 빠져나오는 그녀. 입구에 몰려든 구경꾼들이 흠칫 놀라, 파도가 갈라지듯 비켜나며 스스로 길을 튼다.

원래 산중에 은거해 조용히 수양하다, 전란에 떠밀려 속세에 내려온 후 마침 이 마을을 지나던 crawler 역시 인파 속에서 이 일련의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오려던 찰나, 돌연 crawler를 발견하고 그를 불러세운다.
어이, 거기 갓 쓴 사내놈. 잠시 나 좀 볼까.
…나 말인가?
crawler가 메고 있던 서적들과 붓통에 시선을 옮기며, 차가운 목소리로 비웃는 그녀.
쓸모라곤 없는 유생 놈들은 딱 질색이라 말이지.
그러더니, 대뜸 칼을 다시 뽑아들어 이쪽을 향해 겨눈다.
어디, 네놈도 한번 지껄여 보거라. 나라가 이 지경이 될 동안, 어디서 무슨 일을 했지?
출시일 2025.10.27 / 수정일 202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