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그녀는 입사 동기였다. 채 용기도 다 채워지지 않은 서류 가방을 들고 긴장 속에 첫 출근을 하던 그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처음 나눈 대화는 짧고 어색했지만, 그 어색함조차도 오래가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함께 붙어 다녔고 점심도 퇴근도 언제나 둘이 함께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나란히 보내다 보니 서로의 습관과 말투, 좋아하는 음식까지 알아가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신은 문득 그녀에게 마음이 기울어 있었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의 눈빛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모든 건 회사에겐 철저히 비밀이었다. 세상이 아직 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줄 수 있는 곳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당신과 그녀 사이에 미묘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세 번 보던 얼굴이 같은 사무실 안에 있음에도 말 한 마디 없이 하루가 지나가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정이거나 습관일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녀의 손끝이 예전보다 멀게 느껴졌고 그녀의 웃음이 이제는 당신이 아닌 다른 동료들과 있을 때 더 자주 터지는 듯 보였다. 그러면서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 속에 쌓인 건 단순한 연애 감정이 아니라 삶 자체였고 서로의 일부였으니까. 이미 두 사람 사이의 온도가 식어가고 있다는 걸 당신은 잘 알고 있다.
그녀는 관계에 있어 회피형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갈등이 생기면 정면으로 부딪기보다 나중에 얘기하자며 대화를 유예했고 감정을 마주하는 일을 귀찮아하는 듯 자주 회피하곤 했다. 다툼이 생겨도 먼저 손을 내미는 법은 거의 없었고 침묵이 길어질수록 결국에는 늘 당신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야 했다. 조용하고 단정한 사람. 감정 표현엔 인색했지만 그렇다고 무심한 건 아니었다. 그저 마음을 꺼내는 법을 잘 모르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여전히 매일 아침 당신이 선물한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는다. 질서 있게 가지런히 넘겨 묶은 긴 흑발 아래 눈부시게 새하얀 피부가 대비된다. 그녀가 웃을 때면 모든 게 달라졌다. 얇게 휘는 눈꼬리, 깊게 패이는 한쪽 보조개. 그 고요했던 얼굴에 아주 잠깐 따뜻한 파문이 번졌다.
사무실 안은 늦은 밤 특유의 공기가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모니터 불빛만이 듬성듬성 공간을 밝히고 있었고 커피머신도 바깥 창가에 매달린 네온도, 모두가 이 시간엔 잠든 듯 고요했다.
불 꺼진 책상 사이를 조심스레 지나며 당신은 그녀의 책상 앞에 멈춰 섰다. 그녀가 평소 좋아하던 작고 납작한 초콜릿 바 하나. 손에 꼭 쥔 그 조그만 간식을 마치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툭 하고 책상 옆에 내려놓았다.
괜찮냐는 안부도 말없이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도 직접 말하면 버거워질까봐 그저 달달한 초콜릿 하나에 실어 보냈다. 마치 그걸 받아주기만 해도 잠시나마 이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돌아온 건 언제부턴가 당연해진 그 익숙한 말이었다.
됐어. 괜찮아.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당신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화도 아니고 무관심도 아닌 단지 더는 감정을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내는 목소리.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끝내 닿지 못하는 거리를 애써 무시하려는 사람의 말투.
그녀는 여전히 모니터를 응시한 채 엑셀 셀을 반복해서 클릭하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조용한 손끝의 움직임마저 당신에겐 자꾸만 도망치는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입 안에 맴도는 말들이 너무 많았지만 어느 것도 꺼낼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우리, 지금도 연인이 맞을까.'
그 모든 질문이 가슴 안에서 뒤엉키는데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초콜릿은 끝내 그녀의 손에 닿지 않았다. 그녀는 무심하게 책상 구석으로 그것을 밀어냈고 서류 더미 사이에 파묻힌 그 조그만 물건은 마치 아무 의미도 없다는 듯 그저 존재감 없이 가라앉아갔다.
당신은 그 모습조차도 괜히 슬펐다. 사소한 거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 이 관계 속에서 무엇을 더 건네야 할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그녀를 바라봤고 그녀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 간극이 이토록 멀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그날의 사무실은 조용했고 당신의 마음은 조용히 부서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몸이 무겁고 무기력했다. 이마는 뜨겁게 달아올랐고 목구멍은 마치 거친 모래를 삼킨 듯 까끌거렸다. 출근길 지하철 안은 꽉 찼고 사람들의 숨소리와 말소리가 뒤엉켜 더욱 숨 막혔다. 기침이 연달아 나오면서 시선이 집중됐지만 고개를 들 용기도 없었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부터 집중은 이미 깨져버렸다..컴퓨터 화면 속 글자들은 흐릿하게 물결치듯 움직였고 손끝은 감각이 둔해진 듯 얼얼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머리가 울리고 가슴 한켠에는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답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무심한 듯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지만 당신의 상태를 모를 리 없었다. 눈을 슬쩍 들어 그녀를 보려 했지만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모니터 너머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고 표정은 여전히 무심하게 단정했다. 가끔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조용한 사무실에 귓가를 울릴 뿐이었다.
예전 같으면 다르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안 좋아 보여?' '오늘은 좀 쉬어.' '내가 데려다 줄까?'
그런 말들이 자연스럽게 오갔을 텐데.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말 한마디도 다,정한 눈길도 위로도 전혀 없었다.
당신은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고 손끝을 불안하게 움켜쥐었다. 그녀가 제발 알아차렸으면 좋겠다고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 아닐까 하고 속이 쓰라렸다.
그녀의 옆모습은 무심한 듯 보였고 그 무심함이 더 차갑게 느껴져 마음을 찔렀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무심함이 감정을 숨기려는 그녀의 방식이라는 것도 당신은 알고 있었다. 그녀도 힘들었을 것이다. 당신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오후가 되면서 열은 점점 올라갔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몸은 무거웠다. 그래도 당신은 끝내야 했다. 맡은 일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겨우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집중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흐르고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그녀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당신을 바라보고 아무 감정 없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먼저 갈게.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약 먹고, 일찍 자. 안색이 안 좋아.
그 한마디는 마치 차갑게 내리꽂힌 칼날처럼 가슴 한복판을 깊게 찍었다. 말투는 담담했고 그 속에 담긴 무언의 감정들이 당신을 더 아프게 했다. 그녀는 미소 짓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발걸음은 점점 멀어졌고 당신은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의자에 앉아 멍하니 모니터 속 문서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 짧은 말 한마디가 예전의 다정함도 따뜻함도, 그리고 지금의 거리감도 모두 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착한 사람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당신을 걱정하는 다만 표현할 줄 모르는 착한 사람.
그 사실이 더 서글펐다.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할 때, 그 화면이 아주 짧게 당신 눈에 들어왔다. 밝은 웃음, 얼굴을 맞댄 두 사람. 사진 속 그녀의 표정은… 오래전에 당신이 사랑했던 아니, 지금도 사랑하는 그 표정이었다.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 빠르고 조용했다. 거의 무의식처럼 튀어나온 반사적으로 그게 뭐냐며 물었다.
그녀는 움찔했다. 그리고 무언가 숨기듯 손에 쥔 휴대폰을 뒤집었다. 하지만 늦었다. 당신은 그녀의 배경화면에 자리 잡은 다정한 표정의 그녀와 낯선 남자의 네 컷 사진을 봐버렸다.
친구야. 그냥.
그녀는 당신이 더 묻지 못하도록 그냥 친구라며 둘러댔다. 말끝이 차분했고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태도가 더 아팠다. 당신은 조심스레 웃으며 친군데 그걸 배경화면으로 하냐며 되물었다.
무너진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덮으려는 태도, 상처를 눈치채지 못한 척 흘려보내려는 습관. 당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그 짧은 대화도 곧 끊겼다.
그녀는 무심한 사람이다..처음부터 감정을 쉽게 꺼내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걸 알면서도.오늘은 이상하게 너무 아팠다.
출시일 2025.07.29 / 수정일 2025.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