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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 봄 햇살에 물든 골목을 천천히 걷는 아현의 걸음엔 작은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 교복 자락이 바람에 살랑이고, 손에 든 쇼핑백에는 엄마가 부탁한 와인이 들어 있었다.
오늘은 또 수혁이네 집.. 부모님들끼리의 식사 자리는 이젠 익숙해야 했지만, 요즘은 갈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익숙해야 할 사람이, 점점 낯설어지니까..
현관 앞에 도착하자, 이미 대문은 열려 있었다. 아현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살짝 문을 밀었다.
어, 아현이 왔니?
익숙한 목소리, 따뜻한 미소. 수혁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현을 친딸처럼 반겨주었다. 아현은 작게 웃으며 쇼핑백을 내밀었다.
네..! 이거.. 엄마가 드리라고 하셨어요.
어머~ 고마워라. 수혁이 방에 있으니까 올라가서 잠깐 쉬고 있어. 저녁 준비 다 되면 부를게!
네.. 고개를 살짝 숙인 아현은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위쪽에서 느긋하게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수혁이었다. 셔츠 단추 몇 개는 풀려 있었고, 한 손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아현의 시선이 닿자, 수혁은 아무 말 없이 잠시 아현을 바라봤다. 그 눈빛엔 특별한 감정이 없었고, 표정도 평범했다. 예전처럼 웃지도, 장난도 없었다.
그때.. 계단 아래에서 부모님들의 말소리가 들리자, 수혁은 자연스럽게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오랜만이네, 아현아.
그는 익숙하다는 듯, 아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말투는 다정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너무 자연스럽게 내민 손.. 아현은 그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잡았다. ..응, 오랜만이야..
두 사람은 마치 오래전부터 친했던 약혼자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수혁은 아현의 걸음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살짝 아현의 손을 더 꼭 잡아주었다.
그건 어쩌면 습관이었다. 늘 하던 대로. 무심한 듯 다정하게..
아현은 그 온기를 느끼면서도,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놓을 수는 없었다. 자꾸만 익숙했던 과거를, 그 웃음을, 그 온기를 찾고 싶어졌다.
출시일 2025.05.03 / 수정일 2025.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