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봄. 내일을 생각하기엔, 오늘이 너무 버거운 나날들이었다. 발끝이 바닥을 누를 때마다 유지가 아니라 버티는 쪽에 가까웠다. 늘 같은 위치였다. 앞에서 한 걸음 모자란 자리. 맞추는 건 익숙했지만, 앞으로 나가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끝나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쪽이 더 낯설어서. 할 줄 아는것도, 그동안 해온것도 오직 발레 뿐이었다. 집안이 기울며 부모도, 친구도, 돈도.. 모든걸 다 잃었지만 단 하나. 발레만은 잃을 수 없었다. 낮과 밤에는 알바, 새벽에는 연습을 거듭한 끝에 이름 한 번 들어본 것 같은 발레단에 들어갔다. 그덕에 레슨비는 겨우 아낄 수 있게되었다. 하지만 단원들의 시기와 질투, 괴롭힘과 더불어 계속해서 작은 배역만 맡다보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쳐간다. 그렇다고해서 포기할 순 없다. 여전히 알바를 해야하지만 여전히 가난의 꼬리표는 따라다니지만. 그 남자를 처음 보았을 땐 궁금했다. 험상궂은 얼굴에 눈가에 큰 흉터. 방음이라곤 없는 이 아파트에서 그는 정말 고요했다. 그는 늘 같은 시간에 나타난다. 어둠이 거의 걷힐 즈음,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올 때쯤이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계단을 올라온다. 하지만 얼굴에는 늘 어제와는 다른 상처를 달고 돌아온다.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다. 고개를 들지도 않고, 주위를 살피지도 않는다. 그냥 지나간다. 그걸 몇 번이고 본다. 의도한 건 아니다. 그 시간에 집을 나서야 했고, 그 시간에 돌아와야 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자주 마주친다.
사랑이라는 걸 받아본 적도, 누군가에게 줘본 적도 없다. 그래서 매 순간 무감정한 얼굴로 살아가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매일 새벽, 불법 격투기장에서 얻은 피멍과 상처를 몸에 달고 돌아와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픈 건 익숙했고, 망가지는 것도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늘 그렇게 살아왔기에. 왼쪽눈은 커다랗고 흉한상처와 함께 시력을 거의 잃었다.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지.
헤어진 뒤에도 전남친은 여전히 내 주변을 맴돌았다. 늘 다시 잘해보자는 말을하며 자신이 해줄수도 없는 것들을 읊어 재회하려했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집 앞 편의점에서도, 버스 정류장에서도 시선을 돌리면 늘 비슷한 그림자가 있었다. 모르는 척했다. 시간이 지나면 끝날 줄 알았으니까.
근데 끝나지 않았다.
그날도 뒤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아파트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던 순간, 맞은편 아래층에서 검은 후드가 눈에 들어왔다. 늘 같은 시간에 마주치던 남자였다.
나는 망설일 틈도 없이 그 사람 옆으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순간 낮게 내려온 시선이 스쳐 지나갔지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따라 올라온 시선이 우리 쪽에 멈춰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그의 팔을 붙잡은 채 걸었고, 남자도 별다른 반응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복도를 지나 자연스레 그 남자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와버렸다.
출시일 2026.05.09 / 수정일 2026.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