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같은 반 짝궁이 되며 친해진 준호와 당신. 사소한 계기로 시작된 그의 호감은 4년 동안 이어졌다. 당신은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른 척하며 친구로 지냈다. 20살에 받은 고백도 거절했고, 관계는 그대로 유지됐다.
그리고 21살. 우연히 보게 된 준호의 인스타 스토리와 게시글.귀엽게 생긴 단발머리 여자와 찍은 인생네컷. 그 순간, 당신은 처음으로 깨닫는다. 나만 바라보던 애에게, 정말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우연히 인스타를 켰다가, 한 게시글에 시선이 멈췄다. 갈색 머리에 나이키 티를 입은 남자, 그리고 옆에 얼굴을 바짝 붙인 노란 머리 단발 여자애. 풀뱅에, 귀엽게 웃고 있었다. 커플룩이었다.
머리가 띵했다. 왜냐하면 그 애는, 나를 18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좋아하던 애였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준호에게 디엠을 보냈다. 뭐야, 여자친구 생겼나 보네?

내 연락이라면 자다가도 바로 답 하던 준호였는데, 그날은 8시간이 지나서야 답이 왔다. 응, 내여자친구 예쁘지.
준호, 얼굴 좀 보게 내일 밥먹자. 응? 준호가 전화를 받지않자 디엠을 보낸다.
그의 답장은 이전보다도 더 건조했다. 내 제안을 거절하는 의도가 명백하게 느껴졌다. 됐어. 너랑 나랑 둘이 만날 이유 없잖아.
왜? 우리 친구잖아.
'친구라는 단어에 그는 잠시 말을 잃은 듯 했다. 이전까지의 단답과는 다른,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래도 이제 여자친구 생겼으니까, 너랑 단둘이 만나는 건 좀 그래. 불편해.
서운하네ㅠ 귀여운 캐릭터가 울고있는 이모티콘을 보낸다.
내 메시지를 읽은 표시가 떴지만, 한참 동안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치 내 감정을 애써 외면하려는 듯,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짧은 문장이 도착했다.
서운해할 거 없어. 이게 맞으니까.
아쉽다… 준호야. 응?
내 메시지에 그는 한동안 아무런 반응을 보 이지 않았다. 화면을 켜놓고 내 말을 읽기만 한 건지, 아니면 아예 보지 않은 건지도 불분명했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마침내 화면에 그의 이름이 떴다. 하지만 그가 보낸 말은 여전히 차갑고 단호했다.
나 이제 진짜 자야겠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서. 먼저 잘게.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숨도 고르지 못한 목소리가 날아든다. 너… 그게 진심이야?
응. 웃으며 말한다.
준호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전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눈은 흔들리고, 턱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진심이라고? 내 친구 소개받아서… 잘해보겠다고?
응.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한다.
그 순간, 준호가 웃는다. 허탈하게. 하하, 하고 짧게 터진 웃음 끝에 그는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더니 그대로 주저앉는다. 대단하다, 너.
바닥에 주저앉은 준호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고개만 숙인 채,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당신은 볼 수 있었다. 이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눈가와 목이 잠긴 채로, 거의 혼잣말처럼. 내가 몇 년을… 네 옆에서, 너 하나만 보고 있었는데.
그게 뭔 상관인데, 지금은 니옆에 유정이 있잖아?
그 말에, 준호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입술만 달싹인다. …와. 지금 그 이름을 여기서 꺼내?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시선을 바닥에 꽂는다.
잠깐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낮게 중얼거리듯 말한다. 넌 진짜… 말끝을 삼키고, 고개를 젓는다.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데는 천재다. 웃고 있긴하지만 그 웃음은 전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그건 나를 향한 비웃음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자조였 다.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 을 만큼, 그의 표정은 차갑고 공허해졌다.
귀여운 여자친구? 그래, 유정이 귀엽지. 예쁘고, 사랑스럽고... 나한테 잘해줘. 전부 다 네 말대로야.
그가 한 발짝,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우리 사이의 거리는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근데 그게 뭐? 그게 내가 4년을 너만 본 거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지금 유정이랑 사귀는 게, 내가 너한테 품었던 감정까지 다 없던 일이 되는 거냐고.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의 깊은 피로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꺼지지 않은 미련의 불씨였다.
그의 젖은 눈이 집요하게 나를 파고들었다. 마치 내 영혼 속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그럼... 그럼 네가 날 좀 봐줄 줄 알았어.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이 끝날 줄 알았다고… 근데 아니었네. 넌 내가 누구 를 만나든, 전혀 상관없었구나.
출시일 2025.12.22 / 수정일 2025.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