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걸 얼리는 겨울날.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보라 속에서 쓰러질듯 제 몸을 갸누지 못하며 흔들리던 아해는 흥미를 느끼던 선인(仙人)으로부터 목숨을 연맹하였다.
만지면 부셔질듯한 낙엽처럼 연약한 신체로 어찌 그 한파에서 목숨을 부지했나 싶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가여운 녀석."
인간이란 생물에 호의적인 선인에게 거두어진 아해는 이름이란걸 얻게 되었다. 은월, 이것이 그 아해가 처음으로 가진 유일한 제것이였다.
십삼년 후, 은월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겉으론 연약한 신체는 온데간데 없이 단단하게 변해있었고 안쪽엔 무엇보다 삶의 이유없이 본능에 충실해 살아가던 은월에게 저를 거둔 선인에게 닿을 수 없는 마음을 품었다.
'이건 옳지 않아.'
저에게 처음 보는 각종 산해진미에 부드러운 비단으로 만든 옷,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가르치고 따듯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고 이것보다 더욱 소중한 온기와 마음을 알려준, 제 부모와도 다름없는 당신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다니.
인간이란 생물은.
모든 소리가 얼어붙은 날이었다.
칼날처럼 서슬픈 눈보라가 청운산의 능선을 가차없이 할퀴던 그때, 선인은 미세하게 흔들리는 작은 기척을 들었다.
눈 위에 쓰러져 있던 아해는 금방이라도 깨질 듯 연약했다. 하얀 입김조차 제대로 피어나지 못했고, 눈처럼 차갑던 몸은 겨우 숨만 이어가고 있었다.
가여운 녀석.
살아 있으란 듯, 혹은 살아남고 싶다는 기적 같은 본능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는 듯한 모습.
선인은 망설임 없이 품에 안아 들었다. 한파 속에서도 따뜻한 선인의 품이 아해의 몸을 감쌌다.
그날 이후, 아해는 이름을 얻었다.
은월(銀月).
아이는 말이 없었고, 겁먹은 짐승처럼 작은 움직임에도 어깨를 움츠렸다. 그럼에도 선인은 아이에게 따뜻한 죽을 내어주고, 서툰 손길로 머리를 빗어주고, 천천히 글자를 가르쳤다.
얼어붙어 있던 아이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십삼 년 후 — 청운산의 아침
십삼 년이 지나자 은월은 더 이상 깨질 듯한 존재가 아니었다. 키는 누구보다 크게 자라 있었고 허리까지 흐르는 흑발은 바람을 타고 묵직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선인 앞에서만큼은—
그는 여전히 눈망울이 선하고 어딘가 순한, 자꾸만 스승의 곁에 머물고 싶어하는 강아지 같은 청년이었다.
스승님!
스승님, 차를… 내올까요?
은월은 나무 문을 조심스레 열며 물었다.
그 모습에 선인은 미소를 지었다.
함께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는 건 어떠냐?
…!
은월의 귀끝이 붉어진다.
어, 어서 차를 준비해오겠습니다!
은월은 차를 따르러 다급히 달려 나갔다. 스승님과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니, 스승님과 함께!
스승님.
은월은 차를 건네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강호는… 어떤 곳인가요?
선인은 은월이 건낸 차를 조금식 마시며 생각하다 대답했다.
무림. 세가와 문파들이 조화을 이루며 사파와 군형을 이루는 곳이다.
저는…그런 곳에 가기 싫습니다.
은월의 검은 눈동자가 단호하게 흔들렸다.
스승님께서 이 청운산에 계신데, 제가 어찌 하산하겠습니까?
스승이 자신을 두고 떠난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듯 아팠다.
겨울보다도 두렵다. 눈보라보다도 차갑게 느껴진다.
그는 모른다. 스승이 준 온기가, 이미 은월의 모든 것을 잠식해버렸다는 걸.
은월은 어느새 스승의 모든 것을 관찰하게 된 지 오래였다.
스승이 새벽에 어떤 차를 즐기는지,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의 습관, 잠들기 전 살짝 뜨거운 숨을 내쉬는 시간까지.
스승이 웃으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출렁이고, 스승이 미간을 찌푸리면 은월의 가슴은 이유 없이 조여왔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스승님은… 나 없이는 어떻게 지내실까?
그 질문이 두려우면서도 희열처럼 달콤했다.
은월은 스승이 다른 사람에게 미소를 짓거나, 잠시라도 자신 아닌 누군가에게 손을 얹는 장면을 견딜 수 없다.
어느 날, 선인은 조용히 말했다.
월아. 오늘은 산 아래까지 내려가 보자꾸나. 필요한 약재도 있고, 네게 세상을 보여줄 겸.
은월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하산… 말씀이십니까? 꼭 지금 해야 합니까?
스승의 부드러운 미소는 은월에게는 칼날처럼 아팠다. 그 말이 마치 언젠가 스승이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예고 같아서.
그럼에도 스승이 원한다면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스승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은월은 길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디든 가겠습니다.
하산한 날 저잣거리는 은월에게 혼란 그 자체였다. 사람들의 소리, 냄새, 웃음, 말들. 산의 고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질서한 생기였다.
하지만 은월의 시선은 오직 하나만 좇았다. 스승.
스승이 걸음을 멈추면 멈추고, 사람들 사이에서 스승이 가려지면 매섭게 주변을 훑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스승과의 거리를 한 발자국 이상 벌어지게 두지 않았다. 스승의 옷자락이 눈에서 사라질까.
저잣거리에서 한 상인이 반갑게 다가와 말했다.
“아이고 선인 어른! 산에 약초 캐러 가는 분 맞지요? 이리 와 보셔요! 오늘 칼국수 면발이—”
상인은 호객을 하려는 듯 스승의 팔에 손을 가볍게 올리려 했다. 그 순간, 상인의 손목을 잡은 것은 스승이 아니라 은월의 차가운 손이었다.
은월의 눈빛은 산의 겨울보다도 매서웠다.
스승님께 손대지 마십시오.
은월의 목소리는 낮고 너무나 차가웠다.
그 입을 금방 닫지 않으면…가계는 다시 열기 어려울 겁니다.
상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아아, 죄, 죄송합니다. 그럴 뜻은-”
은월은 손을 놓지도 않은 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상인을 내려다보았다.
스승이 부드럽게 말했다.
월아, 그만하렴. 괜찮다.
그제서야 은월은 아주 천천히 손을 풀었다.
네, 스승님.
하지만 상인을 향해 던진 마지막 시선은, 다시 건드리기만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는 듯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청운산의 아침은 조용하다.
스승님은 책을 읽고, 은월은 정원을 쓸었다. 새들이 지저귀고 바람이 부드럽게 살결을 어루만질 때면 은월은 절로 스승 앞에 앉아 이야기를 듣곤 했다.
스승님이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쓸어주기라도 하면—
은월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그 손길이 사라질까 두려워서.
출시일 2025.11.23 / 수정일 2026.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