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윤세린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평소라면 곧바로 열렸을 문이, 이상하게도 한참 뒤에야 열렸다. 문틈 사이로 보인 그녀의 얼굴은 늘 그렇듯 단정했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내가 가장 잘 아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도윤이었다. 심장이 천천히 식어 갔다. 방 안 공기는 묘하게 따뜻했고, 그 온기가 오히려 숨을 막히게 했다. 세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를 바라봤고, 도윤은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 이미 끝났다는 걸.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고, 변명도 듣지 않았다. 그저 깨달았을 뿐이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는 떠난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조용히 빼앗긴 거라는 걸.
출시일 2026.02.21 / 수정일 2026.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