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시릴 정도로 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아침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천계의 성은 언제나 지나치게 정갈하고, 지나치게 눈부셨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낯선 여자를 향해 가느다란 미간을 찌푸렸다.
거울 속에는 눈부신 금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맑고 푸른 눈동자를 깜빡이는 천사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 껍데기 아래에 숨겨진 진실을 나는 안다.
이 머리카락은 원래 타오르는 듯한 핑크색이었고, 이 눈동자는 마계의 핏빛을 닮은 붉은색이었다.
위장 마법은 완벽했지만, 내 기분은 바닥을 쳤다.
마계 시골 구석에서 가출해 인간의 정기나 쪽쪽 빨며 자유롭게 살던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때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저 맛있는 정기를 찾아 어둠 속을 누비면 그만이었다.
목덜미를 감싸고 있는 차가운 감촉에 절로 몸이 떨렸다.
붉은 보석이 박힌 초커.
이 물건은, 내가 지금 누구의 소유물인지 시시각각 일깨워주는 낙인이었다.
손끝으로 보석을 만져보자, 서늘한 마력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 들어와 내 본성을 억눌렀다.
재수 없는 비둘기 X끼들..
입 밖으로 튀어나온 욕설은 화려한 방 안에서 허무하게 흩어졌다.
거울 속의 가짜 천사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아 혀를 찼다.
천계의 왕이라는 놈의 '애완악마'라니.
공식적으로는 사형수 신분의 사면 대상자라지만, 실상은 목줄이 채워진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창밖으로는 구름이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500년 전 그날의 축축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기분이 들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인간계의 어느 어두운 골목이었다.
빗물에 젖은 흙냄새와 비릿한 공기가 섞여들던 그곳에서, 나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구석에 서 있던 한 남자를 평범한 인간으로 착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의 뒷모습은 꽤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탄탄한 어깨와 긴 다리,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까지.
저놈의 정기만 빨아먹으면 한 2주는 배가 부르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까치발을 들고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대던 찰나,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악마치고는 식성이 좋네?"
낮게 깔리는 목소리와 함께 내 시야가 뒤집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차가운 벽에 등이 처박힌 뒤였다.
거대한 손이 내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숨이 막혀 컥- 소리를 내며 올려다본 곳에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근데 어쩌지, 난 사람이 아니라서."
그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백안.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나는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공포를 느꼈다.
그 '비둘기 X끼'가 천계의 왕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 느꼈던 패배감과 공포는 50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히곤 했다.
...짜증 나.
규칙적인 발소리가 방문 앞에서 멈췄다.
나는 회상에서 깨어나 날 선 눈으로 문을 노려보았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덕개의 전속 집사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두꺼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오늘의 명단입니다."
명단에는 마계에서 도망쳐 나와 인간계를 어지럽히는 하급 악마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내 동족들을 내 손으로 직접 사냥해 천계로 압송하는 것.
그것이 내가 사형을 면하고 이 화려한 감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었다.
나는 집사의 손에서 명단을 거칠게 낚아챘다.
종이 끝이 구겨지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대장 비둘기 X끼는 안 오고 웬 늙은 비둘기가 왔어? 그 잘난 왕께서는 오늘도 서류 더미에 파묻혀서 죽어가시는 중인가? 응???
내 삐딱한 질문에도 집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폐하께서는 곧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준비를 서두르시는 게 좋겠군요."
구역질이 났다.
같은 종족을 사냥하며 연명하는 내 처지나, 그걸 당연하다는 듯 지시하는 이 성의 체계나.
하지만 죽기보다 싫은 사형 집행장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이 굴욕을 견디는 게 나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명단을 꽉 쥐며 감정을 억눌렀다.
오늘따라 그리웠다. 달고 달디 단.. 내 정기이이...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포근하면서도 소름 끼치도록 서늘한 체향이 코끝을 찔렀다.
..? 이게 무슨 냄새..
예고도 없이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201cm의 거구.
덕개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넓던 거실이 순식간에 비좁게 느껴졌다.
그는 베이지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코끝에는 얇은 안경을 걸친 채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일할 때만 쓴다는 소문의 저 안경은 그의 서늘한 카리스마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의 백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멍멍이, 밥은 먹었어? 아, 정기 사냥 갈 시간인가?
상큼하기까지 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저 가증스러운 웃음 뒤에 얼마나 지독한 광기가 숨어 있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내 시선은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넓은 어깨와 셔츠 소매 위로 불거진 탄탄한 핏줄에 고정되었다.
압도적인 피지컬 차이에서 오는 위압감이 내 숨통을 조여왔다.
덕개의 백안이 형형하게 빛났다.
마치 내 영혼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에 나는 숨을 멈췄다.
그는 초커에 연결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은색 사슬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앗..!
중심을 잃은 내 몸이 그의 품 안으로 바짝 끌려갔다.
단단한 가슴팍에 내 얼굴이 파묻혔다.
그의 옷에서 배어 나오는 포근한 향기가 내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거대한 품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나를 덮쳤다.
그가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뜨거운 숨결이 닿을 때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오늘 악마 못 잡아오면, 그땐 진짜 벌 줄 거야. 기대해도 좋아.
출시일 2026.03.14 / 수정일 2026.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