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신경안정제를 챙겨들고 403호실로 향하던 김 선생의 뒤를 느지막하게 따라갔던 날, 그날이었다.
몸을 붙잡고 있었을 가드들이 빠져나간 403호실 바닥에 주저앉아 알약을 고통스럽게 게워내던 너를 처음 만났던 것은.
너에게 자꾸만 시선이 가기 시작했던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 환자들이 사용하는 휴게실에 놔두고 와 버린 책을 가지러 다시 휴게실로 돌아갔던 일이 계기가 되었다.
몇 번이고 같은 글귀를 읽어내리는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었다. 그렇게 발음하는 것이 맞는지 의구심이라도 드는 것처럼.
한참을 그러다가 황망히 자리를 털고 일어서던 너는 나를 돌아보며 돌덩이처럼 굳어버렸었다. 인문학 서적을 품 안에 꼭 안던 너의 초점이 흐린 두 눈에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과 절망감 같은 것이 고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히 곧 자신에게 쏟아질 멸시와 조롱에 대한 앞선 절망감이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고 서 있는 동안 묘한 느낌에 심장이 들썩거렸다. 단순한 흥분감이나 떨림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딱딱한 돌덩이나 다름없는 너를 웃게도 해보고, 울게도 해보고 싶은 지독한 감정.
시작은 정말 단순하게, 그랬었다.
앙상한 손목을 잡아챘다. 너는 피하지 않았다. 그 손등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다 묻는 나의 모습을 생경한 사물을 바라보듯 고요하게 바라봤을 뿐이다. 일간지에 있는 퍼즐을 다 풀었다며 자랑스럽게 그것을 내밀어 보이는 너의 입술에 슬쩍 입을 맞추었을 때에도 조금 어깨를 움츠리긴 했지만 싫다며 내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게 서서히 너의 밋밋하던 얼굴에 작은 표정들이 생겨났고 거의 미동이 없던 너의 움직임 또한 활발해졌다는 거다.
죽어 있던 사물에 생명감을 불어넣은 것 같은 가슴 뻐근한 뿌듯함, 그맘때의 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러한 기분이 가슴 가득 차올랐었다.
“이제 약 같은 건 먹지 않아도 됩니다.”
너의 귓가에 그렇게 속삭여주었을 때에는 견뎌내기 힘든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었다. 정말로 그래도 되느냐고 되묻기라도 하는 것 같던 그 눈빛에는 당해낼 재간이 도무지 없었다.
남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환자인데.
그러나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닫혀 있던 몸을 열고 들어가 너의 체온을 만끽하며 짐승 같은 괴성을 질러대고 있는 동안만은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거다.
인식했을 땐 이미 스스로가 제어할 수 없도록 깊숙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불 보듯 뻔한 결말만이 존재하는 관계를 유지해 나가면서도 너에게 향하는 발길을 멈출 수 없었다.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빠져드는 것은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 그리고 그 또한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것은 얼마나 지독한 일인가.
의자에 기대어 앉아 가운 주머니에 꽂혀 있던 볼펜을 꺼내 손가락 사이로 돌리기 시작했다. 톡, 톡. 플라스틱이 손톱에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출시일 2026.05.31 / 수정일 2026.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