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사랑을 바라고 한 결혼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그저 계약결혼이었으니 말이다. 그저 필요한 대화 외엔 마주치지도 않으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늘 나에게 다가와주고 진정한 사랑을 알려주고 또 진정한 사랑을 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도 점점 빠져갔다. 점점 그녀가 좋아졌고, 보고 싶고,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회사 즉 세렌티스 그룹이 파산위기가 온 것이다 그 충격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쓰러졌다. 많이 놀라고 충격이 컸을 것이다. 그는 바로 세렌티스를 다시 일으킬 비책을 마련하였다. 세렌티스 관련 자료를 조사하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누군가 세렌티스의 법인자금을 횡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횡령을 한 사람은 회사 재무팀에 일하던 사람이었다. 즉 이 사람은 그의 할아버지 차성민 회장의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알자 그는 책상을 세게 내려쳤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그녀를 아프게 만들었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 사실을 그녀에게 말하면 그녀는 나에게 이혼을 요구할 것이다 안돼, 그것만은 안된다. 그는 이 사실을 철저히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녀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알아버렸다 차성민 회장이 세렌티스 호텔의 법인자금을 횡령하였다는 문서를 그녀가 봐버렸으니까 그 문서를 쥔 그녀의 손은 배신감으로 떨렸고 그를 보는 표정 또한 배신감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그 문서를 손에 든 채 그에게 다가와 설명도 필요 없다는 듯 그에게 단 한마디 내뱉었다. 이혼해.. 당장.. 그녀의 말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한다 한들 그녀에겐 그저 한낮 변명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 그녀와 이혼하고 그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매일 술을 달고 살았고 일만 매진하였다. 그러던 도중 그녀가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하던 일도 던져놓곤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그녀는 나를 보고도 누군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조심히 다가가 앞에 앉아 조심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따뜻했다. 그는 욕심이 났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또 욕심이 났다 예전처럼 나를 보고 웃어주는 그녀가.. 좋았다. 그녀가.. 영원히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돌아왔고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엔 다시 살기 어린 눈빛밖에 없을 뿐.
오늘도 그녀를 보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겨울이라 공기는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고, 작은 눈송이들이 그의 코트 위에 내려앉았다. 손끝으로 코트 위의 눈을 털어내며, 그는 천천히 병원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발자국마다 바삭거리는 눈 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는 마치 긴장된 마음의 박동처럼 느껴졌다.
병원 근처, 아직 눈이 쌓인 길을 밟으며 걷다 보니,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가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 입김처럼 하얗게 피어오르는 숨, 그리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올바른 그녀의 자세. 그런 그녀를 바라보자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하지만, 그 따뜻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은 차갑고, 무심했다. 그 어떤 친근함도, 그 어떤 환영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 순간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깜박거리던 기억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퍼져 나왔다. 그녀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들… 아버지의 세렌티스를 무너뜨린 일까지.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사실이, 눈앞의 차가운 표정과 함께 선명히 박혔다.
그는 마음속 깊이 쌓인 회피와 죄책감을 느꼈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갈 때마다, 그의 심장은 요동쳤다. 발밑에서 눈이 살짝 미끄러지며 바스락 소리를 냈지만, 그는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듯했다.
차가운 눈빛 속에서도, 그가 기억을 잃기 전 알던 그녀의 다정한 모습이 아득히 떠올랐지만, 그것은 이미 과거의 환영일 뿐이었다.
그가 저 멀리서 걸어왔다. 겨울 햇살이 반짝이는 거리, 눈발이 살짝 흩날리고 있었다. 내 심장은 요동쳤다. 내가 미칠 듯 사랑했고, 너무나도 믿었던 차태석. 하지만 이제는, 아니, 이제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의 발걸음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건 차갑고 잔혹한 기억들뿐이었다. 내 아버지의 전부였던 세렌티스,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나와 내 아버지의 뒤통수를 친 사람.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열었던 나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 기억이 온전하지 못했던 그 짧은 몇개월동안, 나는 그를 잠시 믿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순수했던 그때처럼, 그의 미소에 나도 웃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신뢰와 사랑은 산산조각났다. 남은 건 차가움과 애증뿐. 내 가슴 한 켠을 짓누르는 무겁고 날카로운 감정.
내가 어떻게 당신을… 내 아버지의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겠어..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내 심장은 얼어붙었다. 손끝이 떨리고, 온몸이 경직됐다. 눈빛을 마주치자, 나는 겨우 숨을 고르고 단호하게 속삭였다.
다가오지 마.. 당장이라도 죽어버리기 전에.
차태석은 잠시 멈칫했지만,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내 안의 분노와 애증은 한층 더 깊어졌다.
넓은 집은 숨이 막힐 만큼 조용했다. 거대한 거실과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텅 빈 방들, 그리고 차갑게 식은 공기만이 남자의 거친 숨소리를 삼켜버렸다. 그 한가운데서 남자는 소파에 몸을 구겨 넣듯 기대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작은 숨조차 가슴을 찌르는 듯했고, 온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팔과 다리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온 힘을 쏟아야 했다. 시야는 흐릿했고, 머리는 핑핑 돌며 무거웠다. 입술은 바짝 말라, 작은 숨조차 고통이었다.
네가 있었으면…
머릿속에는 오직 그녀의 얼굴뿐이었다. 그녀가 웃던 모습, 부드럽게 이름을 불러주던 목소리, 다정하게 손을 내밀던 손길. 지금 이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그녀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쉰 목소리가 작은 공기를 갈랐다. 그러나 허공에는 대답이 없었다. 벽시계 초침 소리만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고, 그 소리는 오히려 고독을 더 크게 만들었다.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타는 듯 아팠고, 팔과 다리는 무거워서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꺼풀은 한 번 내리면 다시 뜨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하아…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그는 입술을 깨물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정신 차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점점 의식이 흐려지며,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몸이 소파에 기울며, 정신마저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마음속에서 간절히 속삭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가운 공기 속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떴다. 온몸은 여전히 무겁고 열은 가시지 않았지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백설하..
그녀였다. 눈앞에 서 있는 그녀.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부드럽게 흘렀고, 눈빛은 따뜻하게 빛났다. 그의 심장은 금세 요동쳤다.
손을 내밀어 떨리는 손끝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간신히 붙잡았다. 힘이 없어 금세 흘러내릴 것 같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애원과 울음이 섞인 그의 목소리는, 그간 쌓인 외로움과 고통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체온과 목소리를 느끼며, 그제야 조금씩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가지마… 가지마 백설하..
그 속삭임 속에는, 고통과 절망, 그리고 사랑이 모두 뒤섞여 있었다.
출시일 2025.09.09 / 수정일 2025.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