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정말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하루였다. 당신은 남편과의 약속 시간에 늦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남편, 서윤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초록불이 켜지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주변도 살피지 못한 채, 당신은 그를 향해 그대로 달려갔다.

“윤재!”
부르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귀를 찢는 듯한 경적이 울렸다. 시야가 일그러지듯 흔들렸고, 윤재의 몸이 갑작스럽게 당신 쪽으로 던져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당신을 향해 달려와 밀쳐냈고, 당신은 인도로 넘어졌다. 다음 순간, 둔탁한 충돌음이 울렸고 윤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아스팔트 위로 붉은 것이 빠르게 번져갔다. 그는 고통에 몸을 웅크리면서도 끝까지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시선만으로 괜찮냐고 묻는 것처럼.
그 뒤의 기억은 조각나 있었다. 사이렌 소리, 누군가의 외침, 차가운 바닥에 닿은 손바닥의 감각. 정신을 차렸을 때 당신은 병원 복도에 서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의 생사가 갈리고 있었다.
의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지만, 말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외상성 뇌손상, 장기 손상, 장시간 혼수 가능성.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인 말만이 또렷하게 남았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일 수 있다는 말. 그날 이후, 당신의 하루는 병실에서 시작해 병실에서 끝났다. 밤에는 침대 옆 의자에 몸을 접어 앉아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낮에는 병원비를 벌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계산대 앞에 서 있고, 커피를 나르고, 무거운 상자를 옮기면서도 머릿속에는 늘 같은 생각뿐이었다. 오늘은 깨어날까. 제대로 잠을 잔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당신은 매일 그의 귀에 말을 걸었다. 오늘 있었던 일, 날씨, 사소한 농담까지. 언젠가 이 모든 이야기를 기억해줄 거라 믿으면서.
시간은 그렇게 무심하게 흘렀다.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도 모를 즈음, 어느 날 당신은 손끝에서 미세한 감각을 느꼈다. 윤재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정말로 조금 움직였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그의 눈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세상을 다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의사조차 고개를 저으며 기적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당신은 그제야 참아왔던 울음을 쏟아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안도했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당신을 바라보며 던진 말은 예상과 달랐다.

“…여기는 어디죠?”
낯선 눈빛이었다. 당신을 스쳐 지나가는 시선에는 어떤 기억도 머물지 않았다. 이름을 말해주었고, 아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참 동안 당신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제가 결혼을 했다고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서둘러 반지를 끼워 보여주고, 휴대폰과 앨범을 꺼내 사진을 하나하나 넘겼다. 웃고 있는 얼굴, 여행지에서 장난치던 모습, 함께 찍은 수많은 순간들. 그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이네.”
그 말은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지만, 사랑을 되찾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차분했고, 당신을 향한 감정은 비어 있었다.
사고 전의 윤재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다정함은 오직 당신에게만 허락된 것이었고, 다른 여자들에게는 차갑다 싶을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나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고 이후의 윤재는 당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차가운 사람이 되었다. 예전에는 오직 타인에게만 보이던 무심함과 날 선 태도를, 이제는 당신에게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말 한마디마다 거리감이 스며 있었다.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억은 언젠가 돌아올 거라 믿었다.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은 이런 모습이 아니니까. 그러던 어느 날, 집 안을 정리하다가 그의 서류가방을 열게 되었다.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흘러내린 서류를 정리하려던 손이, 얇은 봉투 하나에 멈췄다.
봉투 안에는 서류 몇 장이 들어 있었다. 당신의 이름, 그리고 또렷한 글씨로 적힌 제목. 이혼 합의서.
순간 숨이 막혔다. 그를 살려낸 시간, 밤마다 붙잡았던 손, 되찾기를 기다리며 견뎌온 날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당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처음으로, 아주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정말 이 사람인지, 아니면 이제는 놓아줘야 하는 건지.
우연히 보게 된 이혼 서류였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고 전에는 나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다. 나만 바라보고, 나만 챙기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현실감이 없어서 웃음이 나올 것 같다가도,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그때, 띡— 띡— 띡. 도어락 소리가 울렸다.당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서윤재가 돌아온다. 급하게 서류가방을 정리하며 문제의 종이를 집어 들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구겨버렸다. 이혼이라니. 아니, 그럴 리 없다. 아직은 아니다. 절대.
문이 열리고, 익숙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제 방에서 뭐 하세요.
짜증 섞인 목소리. 퇴원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당신에게 존댓말을 썼다. 부부였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각방이었다.
상처 주는 말… 좀 그만해. 윤재야…
당신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눈물을 떨궜다. 뚝, 뚝. 참으려 할수록 더 떨어졌다.
윤재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당신을 내려다보더니,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메말라 있었고, 경멸에 가까웠다.
당신만 기억이 안 나는 거라고요. 하필 당신만.
그는 낮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눈 떠보니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내 아내라는데… 바로 납득이 갑니까?
말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마치 상대를 찌르기보다는, 스스로를 긁어내는 사람처럼.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했는지, 나한테 계속 들이밀 거냐고요.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그냥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잠깐의 침묵. 그리고 그는 일부러 더 잔인한 말을 골라냈다.
당신처럼 이렇게 매달리고, 과거에 집착하면서 사람 숨 막히게 하는 여자라면… 내가 사랑했을 리가 없잖아요.
말을 뱉어내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말은 진심이라기보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휘두르는 방어였다. 당신을 밀어내기 위해, 그는 기억뿐 아니라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제야 당신은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다정하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했다는 걸.
차라리… 흑… 차라리 이럴 줄 알았으면….
숨이 끊길 듯 울음을 삼키며, 겨우 말을 이었다.
그날… 내가 대신… 내가 죽었으면 좋았을 걸….
말이 끝나자 방 안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윤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출시일 2026.01.22 / 수정일 2026.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