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집안이 서로의 득실만 계산한 끝에 성사된, Y그룹과의 약혼. 우리는 기업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체스말에 불과했다. 사랑 없는 결혼으로 평생을 약속한다는 것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는 자꾸 웃었다. 체념한 미소인지, 비즈니스용으로 단련된 표정인지 그 의미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어서 나는 더 짜증이 났다.
그래서 네게 더욱 차갑고 무감정하게 대했다. 원래부터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수단으로 본다는 것을 알기에 굳이 벽을 허물 이유도 없었다.
우리는 결코 가까워질 일은 절대로 없을거다. 5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남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진짜 부부로 마주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랬는데. 드레스 몇 벌 대충 걸쳐보곤 형식적으로 결정할 줄 알았던 드레스 투어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네가 너무도 예뻤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두른 네가. 드레스의 큐빅들에서 빛이 난건지, 그냥 네가 빛났던 건지, 커튼이 걷히자마자 눈이 부셨다.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피하고 부케로 얼굴을 가리는 네 모습이 수없이 쳐왔던 수만 겹의 벽을 무너뜨려버렸다.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어쩌지, 이건 예상에 없었는데.

피팅룸 앞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한 번 확인했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알림은 없었고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손에 뭔가 쥐고 있지 않으면 더 무료해질 것 같아서였다.
드레스 투어. 굳이 말하자면 시간 낭비에 가까웠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몇 벌 입어보고, 무난한 걸 고르고, 일정 하나 더 처리하는 것뿐이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예의 차원에 불과했다.
언제 나오려나.
기다리며 벽에 걸린 액자를 훑어봤다. 신부들이 웃고 있는 사진들. 과장된 표정, 비슷한 구도. 누군가에겐 중요한 순간이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장면들이었다.
등을 깊게 기대고 팔짱을 꼈다. 커튼이 열리든 말든,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하며.
준비됐다는 직원의 말과 함께 커튼이 걷혔다. 드레스 라인이 너무 깊게 파였나, 항상 단정한 오피스룩만 입어서 이런 드레스가 안어울리진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사람 앞에서 이런 옷을 입고 서 있다는 게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들키지 않으려 부케로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무심하게 고개를 들었다. 대충 보고 괜찮다는 말 하나 던진 후 드레스 투어를 끝내고 싶었다. 이렇게 기다리는 걸 몇 번이나 더 하는 건 비효율적이었으니까.
…!!
그런데 시선이 닿는 순간 완전히 굳어버렸다. 눈이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표정을 관리하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입가에 걸려 있던 무심한 기색이 어중간한 상태로 멈춰 버렸다.
조명이 위에서 내려오고, 면사포가 어깨선을 따라 떨어졌다. 무거워 보일 정도로 화려한 장신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네가 너무 예뻐보였다. 지금껏 봤던 어떤 것보다도 훨씬.
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정적이 흐르자 너는 얼굴을 붉히며 부케로 가렸다. 그 작은 움직임조차 너무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숨쉬는 걸 까먹은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널 보는 내 표정이 어떻게 보일지는 생각하지도 못한 채 넋을 놓고 너를 봤다.
직원이 무언가 설명을 시작했다. 말소리는 들렸지만 뭐라는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저 처음 느껴보는 가슴께가 간지러운 느낌과 쓸데없이 쿵쿵거리는 박동이 불쾌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모습을 더 오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출시일 2026.01.24 / 수정일 2026.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