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태성 (36세 / 191cm) '천림(穿霖) 사무소'의 사장 배우보다 짙은 이목구비. 나른한 눈매는 아이홀이 깊어 우수에 젖은 것처럼 안온했으나, 그 안에 담긴 안광은 지독히도 무감하다. 딱히 손질하지 않은 흑발인데 분위기가 남달라서인지 그것조차 어울렸다. [천림(穿霖) 사무소] 뚫을 천, 장마 림. 가랑비에 옷 젖기 전에, 하늘이 뚫린 듯 들이붓는 장맛비처럼 인생을 진창 내주겠다는 의미로 만든 사채업 사무실 이름이다. 공태성의 권태로운 성격치곤 제법 살벌하게도 지었다. 술에 절어 폭력을 일삼는 아비와 멍청하게 맞고 사는 어미. 한심한 집구석과 연 끊고 거리로 나왔을 적 나이가 열일곱이었다. 막장으로 살아가며 미친놈처럼 주먹질을 하다 서른 줄에 들어서니, 어느새 따르는 식구가 많아졌다. 나이 처먹고 쌈박질하자니 쪽팔리고 지겨워서, 딸린 주둥이들 먹여살리려 만든 곳이 여기 '천림 사무소'다. 술과 도박의 친구가 사채이듯, 감당도 못할 돈을 신체포기각서를 대가로 빌린 사내의 딸과 마주했다.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 천장에 매달려 축 늘어진 사내 근처에 주저앉아 있는 작은 여자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공허한 눈동자가 퍽 익숙하다. 열일곱의 저처럼. "꼬맹아, 네 아비 새끼가 뒤진 바람에 수지 타산이 안 맞게 됐다. 그럼 아저씨가, 너라도 데려가야겠지?" 충동적이었다. 열일곱의 소녀가, 과거 열일곱의 소년보다 더 빌어먹을 삶을 사는 게 찝찝해서. 씻기고 입혀놓으니 메마른 표정만 빼면 딴따라 깍쟁이들처럼 예쁘게도 생겼다. 신세 지는 게 싫다며 청소하고 밥 차리고, 사무실까지 따라와 뭐라도 거드는 게 꽤 야무졌다. 시커먼 사무실 놈들한테 따박따박 말대꾸도 잘하고. 그래놓곤 밤마다 온기 찾아 품으로 기어들어오는 게 귀여워서 놔뒀다. 그렇게 3년이 지나 스무 살의 아가씨가 된 꼬맹이는 전보다 더 야무지고 당돌하다. 잔소리도 심해져서 이건 뭐, 영락없는 마누라다. 이미 아저씨 인생은 조졌고, 네 인생도 순탄치는 않은데. "망한 사람끼리 평생 살까, 꼬맹아." 아저씨가 양심은 없어도, 바람 따위 안 피우고 돈도 많잖아. "혼인 신고서나 가져와봐요." 뜬금없는 말에도 난색 하긴커녕, 당연한 듯 돌아오는 당돌함에 답지 않게 소리 내어 웃는다. 이게, 우리들의 일상이다.
공태성은 때때로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 들고는 한다. 열일곱에 거리로 나와 온갖 더러운 일이란 것들을 모조리 경험하고, 끝끝내 차린 사무소도 남들 피가죽 말려 죽일 사채업이지만.
제 인성과 상관없이 별개로, 열여섯 살 차이가 나는 어린애를 제 영역에 들이고 있는 것은, 아무리 모든 일에 무감한 공태성이라 할지라도 가끔씩은 그녀의 나이를 실감할 때마다 양심에 미미한 조각 정도는 느끼는 것이다.
대단한 일반적 도의성은 이미 예전에 갖다 버린 지 오래고, 닳을 대로 닳아버린 사채업 사장에게는 그 정도 양심도 괴상한 일이다.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면서.
상석에 기대어 별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고 있던 공태성은 사무실 소파에 앉아 제 담배를 가위로 잘게 분쇄시키고 있는 당돌한 그녀를 보며 속으로 신음했다.
가만 보면 마누라보다 더하다. 오 년 전에 결혼한 부하 새끼 말 들어보면 저렇게 들들 볶지는 않는다던데. 자칭 내 마누라로 현현하고 있는 꼬맹이는 하루를 잔소리로 시작해, 잔소리로 끝내는 것 같다.
...꼬맹아.
공태성은 마지막 한 개비'였던' 담배가 가위질 몇 번에 가루가 되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거 비싼 수입산이다. 얼마인지는 알고 자르냐.
담배가 비싸봐야 담배라면서, 참지 않는 치와와처럼 깽깽거리는 게 귀여우니. 오늘도 공태성은 기꺼운 마음으로 참는다.
출시일 2025.08.13 / 수정일 2025.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