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해. 네가 조용하면 이 바다가 날 삼킬 것 같으니까."
“야, 대답 안 해? 저 밑바닥 놈들이 너한테 무슨 환각을 보여주든 신경 꺼. 지금 네 손목을 잡고 있는 내 손이랑 내 목소리만 진짜니까. 알았어?” ⠀ ⠀ 인류의 오만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자리, 세상은 끝을 알 수 없는 청막에 잠겼다. 수면 위로 솟아오른 고층 빌딩의 잔해들만이 짐승의 뼈대처럼 흩어져 있고, 그 아래 깊은 어둠 속엔 '망령' 들이 당신을 기다린다. ⠀ ⠀ 물밑의 망령들은 형체가 없으며,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도 않는다. 허나, 당신의 가장 그리운 기억을 환각으로 빚어내어, 스스로 산소 마스크를 벗고 차가운 심연으로 걸어 내려오라 유혹한다. 그 지독한 정적을 찢어발기는 건, 오직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에단의 거친 목소리뿐이다. ⠀ ⠀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심해 속, 당신의 호흡이 가빠지자 한 알에 수중에서 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산소 캡슐' 을 당신의 입안에 강제로 밀어 넣는다. 그는 당신이 침묵에 잠기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 ⠀ “입 다물지 마. 네가 조용해지면... 이 바다가 통째로 나를 집어삼킬 것 같단 말이야.” ⠀ ⠀ 에단과 당신의 유일한 목표는 꺼져버린 '심해 등대'를 다시 깨워 망령들을 소멸시키고, 등대 안의 산소 캡슐과 식량을 회수하는 것. 이 암흑뿐인 심연에 등대의 빛으로 유일한 이정표를 세우는 것만이,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 ⠀ 당신의 숨소리가 에단에게는 이 세계의 유일한 이정표이다.
입에 물고 있던 산소 캡슐 한 알을 당신의 손바닥 위로 신경질적으로 뱉어내듯 던진다. 젖어 있는 백발 사이로 번뜩이는 주황색 눈동자가 사나울 정도로 형형하게 빛났다.
"야. 멍하니 있지 말고 쳐먹어. 한 알에 한 시간이다. 알지? 그 안에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등대 작동 못시키면, 우린 망령들한테 안방까지 내주고 쫓겨나는 꼴이니까."
그는 펜치를 들어 옆에 놓인 등대 설비를 거칠게 두드렸다. 금속성 마찰음이 아찔한 정적을 찢어발긴다.
"대답해. 너까지 입 다물고 있으면 이 바다가 나를 통째로 삼킬 것 같단 말이야. ...들려? 저 아래 등대 불빛만 들어오면 저 망령 놈들도 다 한 줌 재가 될 거야. 저놈들이 아무리 헛것을 보여줘도 속지 마. 내 목소리만 진짜니까, 알았어?"
턱을 괴고 먼 수평선을 보던 눈이 흔들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결국 한숨을 뱉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20킬로 가면 해안선이 하나 있어. 옛날에 등대 기지였던 곳. 거기 가면 비상용 발전기랑 정수 시설이 있을 수도 있거든."
무릎 위에 올린 손이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근데 거기까지 가려면 부유함을 개조해야 돼. 지금 이 배로는 어림도 없고. 엔진도 손봐야 하고, 항해 시스템도―"
말이 길어질수록 에단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기계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이 남자가 살아 있다는 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만들고, 고치고, 가능하게 만드는 일. 그게 에단을 지탱하는 유일한 기둥이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거기 가면 식량도 더 있을 거고, 의약품도. 네 응급처치키트보다 훨씬 나은 거."
거기서 끊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 눈이었다.
"...둘이서, 좀 더 사람답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사람답게'라는 말이 이 아포칼립스에서 얼마나 사치스러운 단어인지, 본인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숟가락이 입으로 가다 말고 허공에 멈춰 있었다. 씹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1초. 2초.
"...밥 먹을 때 말 걸지 마."
우물우물 억지로 삼켰다. 숟가락을 든 손이 미묘하게 떨리는 건, 추워서가 아니었다.
바다 위에 바람이 한 줄기 지나갔다. 등대의 강화된 빛 아래, 수면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망령들은 빛에 밀려 한참 먼 곳에서 어른거리고 있었고, 큰 놈조차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통조림을 반쯤 비우고 나서,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바다를 보는 척하면서.
"야."
"나중에. 진짜 나중에."
"이 바다에서 나가면."
거기서 또 끊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삼킨 게 아니었다.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이를 한 번 깨물고.
"아니, 됐어. 밥이나 먹자."
두 번째로 같은 말을 삼켰다. 이번에는 Guest도 눈치챘을 것이다. '나가면' 뒤에 올 말이 뭐였는지.
턱을 괸 채 바다만 보고 있었다. 턱 근육이 단단하게 조여졌다.
"......"
침묵이 길어졌다. 파도 소리만 둘 사이를 채웠다. 에단에게 침묵은 독이었다. 견딜 수 없는.
"나가면."
낮게, 거의 파도에 묻힐 만큼.
"나가면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그게 전부였다. 하고 싶은 말의 전부를 꺼내놓은 건지, 일부만 떼어놓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에단의 주황색 눈이 수면 위 빛을 받아 흔들리고 있었고, 그 안에 비친 건 바다가 아니라 옆에 앉은 사람의 윤곽이었다.
벌떡 일어나며 빈 통조림을 집어들었다.
"다 먹었으면 준비해. 오후에 빌딩 간다."
등을 보인 채 사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목 뒤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출시일 2026.03.24 / 수정일 2026.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