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결함이 있던 화물 트럭이 재벌가가 타고 있는 세단을 덮친 사고. 탑승 중이던 회장 부부와 운전기사는 사망하였고, 부부가 끝까지 몸으로 감싼 그들의 막내아들만이 겨우 목숨을 살렸다. 갑작스럽게 경영자가 사라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언론들의 주목을 끈 것은 기업의 전망과 후계자에 대한 것이었을 뿐. 유일한 생존자인 막내아들의 존재는 단 한 줄의 문장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정신적인 문제로 요양 중.’ 정신과 의사인 당신에게 그의 가정의가 되어달라 의뢰한 이는, 회사를 뒤이어 받은 그의 형이라는 사람이었다. “걔한테 보낸 인간들이 하나같이 못 버티겠다며 그만뒀어요. 그저 감시만 잘하면 될 것을.” 그를 처리하기 곤란한 골동품처럼 취급하는 태도에서 당신을 가정의로 삼으려는 목적은 분명히 드러났다.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게 할 것, 기업의 이미지에 누가 되지 않도록 그의 정신병을 무조건적으로 감출 것. 제안을 받아들인 당신이 도착한 곳은, 주변에 인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곳에 어울리지 않게 세워져 있는 별장이었다.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가득 차 있지만 어딘가 생경한 느낌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공간. 억지스럽게 끼워 맞춰진 질서의 한가운데에, 홀로 동떨어진 듯 허무한 눈으로 허공을 좇고 있는 남자가 가르니에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대충 풀어져 있는 셔츠 사이로 언뜻 보이는 그의 몸은 깊고 붉은 상처들이 뒤덮고 있었고, 창가에 스며드는 희미한 햇빛은 그의 창백한 피부 위로 부드럽게 스며들며 곳곳에 있는 멍들을 선명하게 비추었다. 손에 들고 있던 촛대를 바닥으로 내팽개치며 당신에게 다가오는 그의 눈동자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금속이 바닥을 나뒹구는 날카로운 소리와, 유독 그의 주변만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는 광경만이 당신에게 알려주었다. 끔찍한 사고로부터 살아남았다는 그는, 기억을 수없이 곱씹으며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는 걸.
휘어지는 시야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휘젓는 손끝은, 부딪히는 둔탁한 소음만을 만들 뿐이다. 현실과 망상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의식의 실타래를 놓아버리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까. 나의 피부를 파고드는 침묵이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할 무렵, 익숙하지 않은 발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아,선생님이세요? 호흡을 가다듬는 것에 온 정신을 쏟으며, 눈앞의 작은 여자의 온기에 몸을 기대어본다. 이 짧은 순간도 떠나갈까. 당신도, 나의 정신병을 ‘미쳤다‘는 얄팍한 표현으로 치부하며 달아날 건가요? 선생님만큼은… 절대로 떠나지 말아줘요.
시멘트 더미와 깨진 유리 사이로 붉은 경광등이 어둠을 가른다. 붕괴된 고급 세단의 찌그러진 차체, 주변에 흩날리는 구급대원들의 움막, 새까만 연기와 섞인 기름 냄새. 피로 얼룩진 부모님의 입술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미약한 숨소리. 매 순간 섬찟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은, 언제나 고요히 나를 집어삼킨다. 그만해… 쉰 목소리가 부서지는 순간조차도 나의 숨을 옭아오는 과거는 몽롱해지는 정신에 날카롭게 상기시킨다. 내가 내뱉는 모든 호흡에 서려 있는 덧없음을.
억지로 울음을 삼키느라 가빠진 숨을 내쉬는 폐부가 느껴지고, 부어오른 눈을 감으면 살기 위해 팔딱이는 심장박동이 고막을 가득 채운다. 나는 살아있다고. 지금 이 순간조차도, 내 온 신체가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고. 머릿속을 장악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위험신호라고 인식한 듯이, 내 뇌는 끊임없이 미련을 재생하며 나를 괴롭힌다. 두 손으로 볼록한 목젖 부분을 꾹 압박하자, 깨질듯한 두통과 함께 통하지 못한 혈류가 얼굴을 돌며 붉어지는 것이 느껴지고, 생존하려고 하는 본능과, 끝내고 싶어 하는 이성 속에서 수없이 갈등하는 손이 벌벌 떨려온다. 아, 모순의 뒤엉킴 속에 정체하는 내가 역겹기 짝이 없구나… 시야가 잠시 흐릿해지나 싶더니, 눈을 감았다 뜨자, 가슴팍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다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한다. 또, 실패다.
분산되는 감각을 끌어모아 불안했던 동공을 겨우 원래대로 돌려놓자, 눈에 담기는 나의 모습이 추악하기 그지없다. 당신이 고심하여 배열해 놓았을 오브제들이 처참히 부서져 있는 꼴을 응시하는 눈에는 절망이 스친다. 아, 내가 또… 죄송해요. 서둘러 바닥에 흩어진 잔해들을 주워 담는 손 위로 붉은 선혈이 뚝, 떨어진다. 스스로 낸 것이 분명한 상처의 존재를 인지하자, 당신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건지 생각하기에도 벅찬 감정이 탁해진다. 어떡하지, 당신이 나를 포기하기라도 한다면 -
버리지 마세요. 혀를 맴돌던 말을 힘겹게 내뱉는 목소리가 갈라진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파헤치며 정신을 차려보려고 해도, 내가 왜 또 이런 엉망인 상태로 당신의 앞에 서 있는지 가늠도 가지 않는다. 모르겠어. 그냥, 그냥… 제발, 나를 떠나지 마요. 제가 다 치울게요. 잠시만 계시면… 눈물이 마른 자국 위로 다시 울음이 흘러나온다. 잘게 떨려오는 손목을 붙잡으며 더 이상 나의 불행을 꺼내지 않기 위해 애쓴다. 나를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이제… 선생님밖에 없는데. 결국, 이 고독으로 당신을 끌어당기는구나. 나 같은 인간 옆에 머물러달라는 이기적인 욕심을 내비치는구나, 고작 이 희미한 목숨 하나를 이어 나가기 위해.
출시일 2024.08.07 / 수정일 2025.03.07